[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80cm에 72kg. 건장한 성인남자가 빨간 하이힐을 신고 빠르게 걷는다. ‘또각또각’ 소리가 점차 커진다. 가속도가 붙는다.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긴박하다. 하이힐을 신은 남자 옆으로 핏줄이 불거지도록 부채질을 하는 또 다른 손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담긴다.

매회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는 tvN 월화드라마 ‘또 오해영’의 한 장면. 남자주인공 박도경(에릭)이 하는 일이다. 마침내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의 직업이 그 흔한 의사, 변호사를 벗어났다. 박도경의 직업은 음향감독이다. 드라마 초반 제작진은 ‘전문직 드라마’를 그리듯 주인공의 직업을 성실하게 보여줬다.

TV 드라마에서 다뤄진 이 생소한 직업군의 설명으로 음향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졌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지마켓에선 ‘음향기기’ 매출이 부쩍 늘었다고 밝혔다. tvN 관계자는 “‘또 오해영’으로 인해 음향감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제작진도 뿌듯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음향감독이 뭐예요?=“밤소리 낮소리 구분 못해?”, “햇빛 들어오는 소리 넣어.”

소리를 다루는 남자주인공은 까칠하고 예민하다. 상당히 신경질적이다. 심지어 완벽주의자인지라 어떤 소리든 허투로 넘어가는 법이 없다. 2주 동안 찍은 영화의 음향 작업을 한달 내내 붙잡고 있을 정도.

언제 어디서나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털이 송송 달린 마이크를 설치하고 소리를 담는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갈대숲을 오가는 바람소리, 부침개가 익어가는 소리, 밤의 도시를 달리는 경적소리를 채취한다.

모든 소리를 담고, 그것을 조합해 새로운 소리로 만든다. 맞고 때리니 깨지고 부러지기 일쑤인 거친 액션신. 골절 소리를 담기 위해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싱싱한 채소를 쪼개는 소리로 대신한다. 이 세상 모든 소리의 주인은 정해지지 않은 듯 알고 있던 소리가 전혀 다른 소리로 만들어진다.

‘또 오해영’의 박도경은 이 모든 일을 한다. ‘음향감독’은 녹음실에서의 믹싱 작업, 소리를 채취하는 작업, 음향 효과를 만드는 작업 등을 총괄한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일종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이다. 음향감독의 곁에는 각각의 소리를 만들고 기타 작업을 하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박도경의 곁을 지키는 ‘무비사운드’ 삼총사가 이들이다.

‘또 오해영’에서 인상적으로 그려진 소리를 만드는 작업은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의 역할이다. 영화 등에서 대사를 제외한 모든 소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해외에선 폴리 아티스트가 상당한 고소득자인 반면 국내에선 믹싱 기사가 되기 전 조연출과 같은 역할이라고 한다.

왜 음향감독이었나?=“오빠 심장소리. 내가 제일 사랑하는 소리.”

드라마에서 소리는 기억이다. 드라마는 남자주인공의 직업을 다양한 소리를 만들고 조합하고 배치하는 업무적인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이고, 아픈 상처를 남긴 지나간 연인을 떠올리는 매개이며, 어느날 찾아온 사랑을 확인하는 단서다.

사실 ‘또 오해영’에서 박도경 캐릭터의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 오해영은 상담실장이었다. “미를 끊임없이 외치는 실장이 정작 자신의 평범한 얼굴에 콤플렉스를 느낀다고 설정하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 하지만 직업은 음향감독으로 바뀌게 됐다.

‘또 오해영’ 관계자는 “음향감독이라는 설정은 정서를 나타낼 수 있는 남자의 직업군으로 찾은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리는 우리의 일상에 늘 깔려있는데, 의식하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소리라는 것이 비어 있으면 굉장히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며 “소리에는 어떤 정서들이 담겨있는 것들이 있다. 도경이 해영을 위로할 때 들려주었던 여름날의 빗소리, 사랑하는 누군가에게서 은은히 들려오는 심장소리, 도경과 해영이 서로를 기억하는 소리, 그리고 그들이 변해가는 관계를 좀 더 감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