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문화팀=김재범 기자] 현실을 넘어선 공포가 존재할까.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현실은 판타지가 될 수도 있고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악몽으로 남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을 살아가는 충실함은 곧 행복과 불행의 경계점을 이동시키는 동력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 지점이 영화 속 재난의 개념을 현실로 이동시키는 공감의 의미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지금 이순간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부조리가 곧 재난이며 그 재난이 결국은 우리와 함께 숨을 쉬는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터널’은 단순한 의미의 재난 영화로 즐길 수 있지만 의미와 상징성을 부여하는 순간 이 같은 지점을 송곳으로 짚어내듯 예리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영화는 작은 ‘터널’ 이미지로 시작한다. 물이 흐르는 터널 끝은 새하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어둡고 컴컴한 터널 안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함께 묘한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 ‘터널’ 자체가 재난이란 소재를 그린단 사전 정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감정이다. 그 빛은 희망이고 물줄기는 생명이다. 어둡고 컴컴한 길고 긴 터널 속에서도 생명을 흐르고 희망은 있는 법이다. ‘터널’이 결국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길고 긴 과정의 의미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기존 재난 영화가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말의 구조를 그리고 있다면 ‘터널’은 조금 다르다. 영화 시작 5분 만에 사건을 터진다. 관객들에게 준비 시간도 주지 않고 느닷없이 터지는 사건은 당혹감을 선사할 정도다. 재난은 고통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행일 뿐이다.
영화 속 주인공 정수(하정우)는 딸 생일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향하던 중 무너지는 터널 속에 갇힌다. 터널 진입 전 주유소에서 작은 문제가 있었다. 3만원어치 주유를 잘못들은 할아버지로 인해 기분이 상한 그는 할아버지의 ‘넘치는’ 배려로 받아든 생수 두 통이 너무도 고맙고 반갑다. 돌더미 속에 갇힌 그는 놀라울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한다. 터널 밖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자동차 세일즈를 통해 몸에 벤 본능적인 긍정의 힘이 그를 보호했는지도 모른다. 아수라의 지옥 속에서도 그는 기적적으로 큰 상처 없이 생명을 구했다. 이제 버티면 된다. 어둡고 컴컴한 터널 안 정수는 그렇게 한 줄기 빛을 기다린다.사실 진짜 재난은 터널 안이 아니다. 사고가 발생한 뒤 터널 밖은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됐다. 안전 불감증에 걸린 대한민국의 치부가 드러났다. 그 치부를 먹잇감으로 삼고 달려드는 언론의 행태는 존중과 정도(正道)를 잃어버린 ‘미치광이’ 행태를 보인다. 정부의 무능은 한 술 더 뜬다. 고질적 병폐인 전시 행정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부 고위 관료의 판에 박힌 멘트와 사후약방문과도 같은 뒤늦은 일처리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장면이다. 사고와 그 뒤처리 그리고 과정이 몇 년 전 대한민국을 분노케 했고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의도를 했던 그렇지 않던 그것이 현실이고 또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숨을 쉬고 있는 ‘재난’의 실체다. 그것을 경험했고 또 알고 있기에 관객들의 분노 게이지는 급격히 상승하고 공감의 수치는 높아진다.
‘터널’은 사실 무너진 터널 안 한 남자에게 집중된 고통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보단 그 밖에서 벌어지는 웃지못할 상황의 연속성을 통렬한 시각으로 꼬집는다. 무능한 대처 안이한 시스템이 만들어 낸 현실 속 재난을 ‘터널’은 풍자와 독설로 때리고 가르친다. ‘도룡뇽 사건’으로 기억된 천성산 터널 공사를 빚댄 장면에서 등장한 한 마디가 관객들의 묵은 체증을 눌러주기까지 한다. “혹시 잊어버린 것 같아서 말한다. 저기에 갇힌 것은 도룡뇽이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영화 전반이 선택한 포인트는 아이러니하게도 블랙코미디다. 재난물이 가질 수 있고 또 빠질 수 있는 감동과 인간애의 진부한 해석은 잠시 미뤄뒀다. ‘터널’은 현실의 부조리가 시시각각으로 만들어 내는 순간의 재난을 조롱하고 멸시한다. 날카롭지는 않지만 예리한 송곳으로 찔러대는 그 한 점의 부끄러움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잊고 있는’ 또 ‘잊어버린’ 경시의 풍조를 일깨운다.
사회의 무능함은 한 사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의 망각이 모이고 또 모이면 그것은 어둠이 되고 그 어둠이 모이고 또 모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위험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재난이다.
영화 ‘터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망각의 늪에 빠진 우리의 기억을 조롱하고 있었다. 재난의 현실성을 그려낸 보기 드문 영화의 등장이다. 개봉은 오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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