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크노프, 스핑크스 또는 애무(일부 확대), 1896, 캔버스에 유채, 50.5x15.1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페르낭 크노프, 스핑크스 또는 애무(일부 확대), 1896, 캔버스에 유채, 50.5x15.1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모델편 154. 페르낭 크노프

& 마그리트 크노프

그는 여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팜파탈’ 스핑크스

엘리후 베더, 해변의 스핑크스, 1879
엘리후 베더, 해변의 스핑크스, 1879

역시 이 자도 별 볼 일 없는 사내로군.

스핑크스가 혼잣말을 했다.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아, 인간이란 얼마나 멍청한 존재인가. 스핑크스는 네 다리를 천천히 일으켰다. 풍만한 상체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죽여볼까.

그녀는 상념을 이어갔다.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일 자체가 권태로웠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무엇인가.” 그녀는 마주하는 모든 이에게 물었다. 한 명도 답하지 못했다. 죄다 식은땀을 쏟으며 뒷걸음질쳤다.

지금껏 이런 녀석들을 꼬리로, 이빨로, 발톱으로 후리고, 꿰뚫고, 찢어서 씹어먹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놈들의 뼛조각이 발에 차일 지경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 이번에는 좀 더 기대를 했다.

눈앞 청년, 오이디푸스. 그의 눈빛이 너무도 형형했기에. 하지만 그 또한 답을 찾지 못한 듯했다.

훤칠한 나그네여. 주저앉아 울든 도망치든 반응을 보여보라.

스핑크스는 가만히 선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5…. 4…. 3…. 2…. 그러면 그렇지. 그대도 결국 앞서 수백명이 그랬던 것처럼 도망치려고나 하겠지. 스핑크스는 한숨이나 내쉬었다. 그렇게 뛰어들 준비에 나선 순간….

프랑수아 에밀 에흐만,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903, 캔버스에 유채, 76.5x106.3cm, 스트라스부르 근현대미술관
프랑수아 에밀 에흐만,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903, 캔버스에 유채, 76.5x106.3cm, 스트라스부르 근현대미술관

“정답은 인간이야.”

“뭐라고?” 스핑크스는 반사적으로 사내의 말을 받아 되물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기는 네 발, 청년은 두 발, 노인은 지팡이까지 더해 세 발로 걷지. 내 말이 틀렸나?” “아, 아니….” 스핑크스는 당황했다.

어쩌다 사내의 가슴팍까지 달려들긴 했지만, 발톱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인간’이 정답이었기에. 맞는 말을 한 이상 해코지를 할 수 없었기에.

스핑크스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까이서 본 오이디푸스의 얼굴은 더… 아름다웠다.

유혹하고 싶다. 그래서, 몸이 아닌 마음의 파멸이라도 끌어내고 싶다. 스핑크스는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다. 본능이었다. 사랑 따위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기에, 갑자기 찾아온 이 기분을 뒤틀린 형태로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08, 캔버스에 유채, 189x144cm, 루브르 박물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08, 캔버스에 유채, 189x144cm, 루브르 박물관

오이디푸스 또한 그런 스핑크스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애써 티 내지 않았지만, 그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직전까지 경멸의 눈빛을 쏘던 그녀가, 이제는 자기 품에 안기다시피한 채 수줍은 낯빛을 보인다. 수많은 이의 가슴에 발톱을 찔러넣던 그녀가, 자기 앞에서는 농염한 몸짓으로 꼬리만 치고 있다.

청년의 심장도 펄펄 뛰었다. 이 요사스러운 괴물을 완전히 복종시키고 싶은, 정복욕 때문이었다. 이 또한 본능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페르낭 크노프, 스핑크스 또는 애무, 1896, 캔버스에 유채, 50.5x15.1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페르낭 크노프, 스핑크스 또는 애무, 1896, 캔버스에 유채, 50.5x15.1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스핑크스는 사내에게 천천히 제 얼굴을 붙였다.

너는 다른 녀석들과 다르다는 인정의 표시이자 애정의 갈구였다. 오이디푸스 또한 훗날의 평가가 어떻든, 당장의 분위기에 몸을 맡겼다.

팜파탈. 스핑크스는 그렇게 제 뜻과 상관없이 요부가 돼버렸다. 페르낭 크노프가 <스핑크스 또는 애무>로 이 장면을 그렸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스핑크스가 이런 괴물이었는가.

의문이 생긴다.

익히 알려진 스핑크스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이는 당연히 들 수밖에 없는 궁금증이다. 그렇다면 크노프는 왜 전승을 따르지 않았는가.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차근차근 추적해보자.

‘아름다운’ 괴물의 탄생

귀스타브 모로, 여행자 오이디푸스, 1888년경, Musée de la Cour d‘Or
귀스타브 모로, 여행자 오이디푸스, 1888년경, Musée de la Cour d‘Or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스핑크스는 원래 요부와는 거리가 먼 상상 속 생물이다.

스핑크스는 대개 여성의 얼굴과 상체를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에 사자의 하체와 독수리의 날개, 뱀의 머리가 붙은 꼬리를 달고 다닌다는 설정이 더해져 있다.

불사의 물뱀 히드라,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 강철보다 두꺼운 가죽을 가진 네메아의 사자.

스핑크스는 이처럼 걸출한 존재들과 한 핏줄이었다. 완력은 이들보다 밑이었다. 그래도 훨씬 나은 게 있었는데, 그것은 지성이었다. 그녀는 떠돌이 뮤즈에게 세상 이치와 여러 수수께끼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핑크스는 가정의 여신 헤라의 부름을 받았다.

헤라는 그녀에게 부정(不正)을 일삼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응징하라고 명령했다. 스핑크스는 그때부터 테베 주변 피키온 산에 눌러앉았다.

오가는 이들을 상대로 문제를 내고, 맞추지 못하면 찢어서 잡아먹었다. 라이오스는 물론, 테베의 모든 이가 그녀 때문에 공포에 떨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저 멀리서 또 한 사내가 걸어왔다. 그가 바로 오이디푸스였다. 스핑크스는 재차 호기롭게 수수께끼를 내보였다. “정답은 인간이야.”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담담하게 꺼낸 답을 듣고 굴욕감에 젖었다. 끝내 수치심을 떨치지 못한 그녀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쳤다.

한 쪽이 문제를 내고, 또 다른 쪽이 답을 말하고, 이에 한 쪽이 죽어버린다. 이게 가장 널리 알려진 스핑크스 이야기다.

그렇다면 크노프는 이 이야기의 틈을 비집고 왜 <스핑크스 또는 애무>라는 야릇한 그림을 그렸는가.

사실, 크노프만이 스핑크스를 요부로 그리지는 않았다.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 캔버스에 유채, 206.4x104.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 캔버스에 유채, 206.4x104.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크노프보다 한 세대 앞선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도 그런 그림을 그렸다. 모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에서 두 존재 사이 감도는 미묘한 감정선을 표현했다. 옹골찬 오이디푸스 앞에 매달린 스핑크스는 가녀리고 청초해보이기도 한다.

프란츠 폰 슈투크, 스핑크스의 키스, 1895, 캔버스에 유채, 160x144.8cm, 부다페스트 미술관
프란츠 폰 슈투크, 스핑크스의 키스, 1895, 캔버스에 유채, 160x144.8cm, 부다페스트 미술관

크노프와 동시대 화가인 프란츠 폰 슈투크는 아예 <스핑크스의 키스>라는 작품도 내놓았다. 화폭 속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와락 달려든다. 양팔로 그의 등뼈를 끌어안은 채 진한 입맞춤을 퍼붓는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턱선, 육감적인 몸매가 단연 돋보이는 작업물이다.

따지고 보면 스핑크스는 신화 속 무수히 등장하는 보통 괴물로는 볼 수 없다.

우선은 괴수치고는 흔치 않게 완전한 여성 얼굴을 하고 있다. 또, 단순한 힘이 아닌 일종의 지적 대결을 통해 승부를 겨룬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전자에선 아름다움, 후자에선 신비로움의 이미지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다.

스핑크스류의 또 다른 여성형 괴물, 이를테면 인어메두사(저주를 받기 전)에 대해선 고혹이나 매혹이란 말이 따라붙었다는 점도 상기해볼 지점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 스핑크스, 1904, 캔버스에 유채, 83x157cm,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 박물관
프란츠 폰 슈투크, 스핑크스, 1904, 캔버스에 유채, 83x157cm,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 박물관

스핑크스는? “아름다웠다”는 표현을 쉽게 찾을 수는 없지만, 대놓고 박색(薄色)이었다는 묘사 또한 확인하기 어렵다. 전승으로 내려오던 스핑크스가 자연스럽게 팜 파탈 인상을 품은 건 이러한 요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크노프가 <스핑크스 또는 애무>를 그린 배경 또한 이 설명으로 끝낼 수 있는가. 애석하게도 오직 크노프에 한해서는 이 또한 절반의 탐구일 뿐이다.

그의 예술은 만만치 않다. 이 그림을 보다 완전히 알아보기 위해, 이제는 그림 속 모델의 정체를 알아봐야 한다.

그가 그린 스핑크스의 정체

페르낭 크노프, 잔잔한 물, 1894, 캔버스에 유채, 53.5x114.5cm, 벨베데레
페르낭 크노프, 잔잔한 물, 1894, 캔버스에 유채, 53.5x114.5cm, 벨베데레

크노프는 그의 여동생 마그리트 크노프를 모델로 스핑크스를 그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여섯 살 어린(추정) 친동생을 요부로 묘사한 격이다. 미술사의 맥을 짚다보면 많은 화가가 주변인을 요녀로 묘사한 일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과 핏줄인 여동생을 팜 파탈로 묘사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 여동생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를 모델로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린 사례 또한 굉장히 흔치 않은 일이다.

이쯤 되면 생각 한 움큼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다.

둘은 도대체 어떤 사이였을까.

페르낭 크노프, 마그리트 크노프의 초상화, 1877, 캔버스에 유채 등, 96x74.5cm, 킹 보두앙 재단
페르낭 크노프, 마그리트 크노프의 초상화, 1877, 캔버스에 유채 등, 96x74.5cm, 킹 보두앙 재단

먼저 크노프가 그린 <마그리트 크노프의 초상화>부터 보자.

그림 속 마그리트는 단아한 인상을 품고 있다. 긴 목과 굴곡 없는 어깨, 쭉 뻗은 팔다리와 군살 없는 몸매도 주목되는 지점이다. 화가는 그녀의 은은한 눈빛과 위에서는 양옆으로, 밑에서는 위아래로 뻗는 옷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을 것이다. 이는 모델을 향한 애정이 없다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터였다.

페르낭 크노프, 테니스 또는 기억, 1889, 캔버스에 유채, 벨기에 왕립 미술관
페르낭 크노프, 테니스 또는 기억, 1889, 캔버스에 유채, 벨기에 왕립 미술관

크노프가 마그리트를 세워놓고 그린 <테니스 또는 기억>도 함께 꺼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화폭 속 여성은 일곱 명이다. 사실은 모두가 마그리트다. 화가는 그녀만을 이리저리 세워놓고, 오직 그녀만이 가득한 세상을 내보인 셈이다.

페르낭 크노프, 향, 1898, 캔버스에 유채, 56x50cm, 오르세 미술관
페르낭 크노프, 향, 1898, 캔버스에 유채, 56x50cm, 오르세 미술관

<향>도 흥미롭다. 여기서 마그리트는 신화 속 신의 음성을 전하는 사제처럼 등장한다. 본인 또한 숭배 대상이 됐다는 걸 알고 있는 듯 위엄에 찬 기색도 엿볼 수 있다.

상당수 미술사가는 이런 결과물을 통해 크노프 그녀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꼈으리라고 본다.

심적으로나마 혈육 사이 금기의 선을 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크노프가 <스핑크스 또는 애무>를 그리고, 여동생을 팜 파탈로 묘사한 일 또한 이에 대한 연장선이라는 이야기다.

크노프의 그림을 더 자세하게 뜯어보면 이 주장에 힘을 더 실어줄 수 있는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화폭 속 마그리트의 얼굴이 그렇다. 크노프의 작품 속 마그리트는 대개 정면을 바로 보기를 피한다. 친오빠가 본인을 향해 끈끈한 애정을 보일 때 많은 경우 여동생은 이를 그저 부담스러워할 것이다(이 또한 본능에 가깝다). 이에 따른 반응이 캔버스에 담겼다는 말도 예술계에서는 나온다.

그녀가 목까지 올라오는 흰 드레스, 카라까지 채워지는 여러 원피스, 아예 두건에 로브까지 챙긴 채 모델로 선 이유도 비슷한 결로 추측할 수 있다.

페르낭 크노프, The Game Warden, 1883, 캔버스에 유채, 151x176.5cm, 슈타델 미술관
페르낭 크노프, The Game Warden, 1883, 캔버스에 유채, 151x176.5cm, 슈타델 미술관

또 하나.

크노프가 마그리트를 세워둔 채 그린 그림을 보면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게 있다.

장갑이다. 크노프가 그녀에 대해 ‘굳이’ 장갑까지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접촉을 원천 봉쇄하는 장갑은, 종잡을 수 없는 심리 속 이성을 챙겨야 한다는 걸 일깨우는 그만의 상징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추측이 다 맞다면 크노프가 <스핑크스 또는 애무>에선 왜 봉인을 풀었는가.

크노프가 스핑크스를 빌려온 건, 실은 그와 마그리트의 사이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꾹꾹 눌러둔 그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스핑크스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무슨 논란이 일어도 “나는 신화를 재해석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그녀는 사랑인가, 상징인가

페르낭 크노프, 쟌느 케퍼의 초상화, 1885, 캔버스에 유채, 80x80cm, 게티 센터
페르낭 크노프, 쟌느 케퍼의 초상화, 1885, 캔버스에 유채, 80x80cm, 게티 센터

크노프는 여동생 마그리트를 사랑했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다만 예술계에서는 그 마음의 성질을 이성간의 그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즉 크노프가 마그리트를 단순히 남자 대 여자로 사랑하지 않고, 아주 다른 방향과 차원에서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크노프의 예술은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다.

먼저 크노프의 삶을 짚어봐야 한다.

크노프는 1858년 벨기에 그렘베르겐에서 출생했다. 판사와 변호사를 두루 지낸 법조인 집안에서 컸기에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는 1876년 브뤼셀에 있는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다. 1877~1880년 사이 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를 오가며 공부를 이어갔다.

크노프는 언젠가부터 아카데미 화풍도, 인상주의 회화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두 양식은 서로 무척 다르지만, 화가 개인의 영적 기운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크노프는 그게 불만이었다. 그는 예술가라면 응당 자기 정신을 작품에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페르낭 크노프, 제물, 1891, 종이에 파스텔 등, 34.9x74.9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페르낭 크노프, 제물, 1891, 종이에 파스텔 등, 34.9x74.9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런 크노프가 관심을 가진 사조가 상징주의였다.

이는 당시 나르시시즘이 강한 예술가라면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기법이었다. 상징주의는 화가 본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으로 창작을 시작한다. 아카데미즘이 규범, 인상주의가 외광(外光) 등 바깥세상에서 태동에 나선다고 보면 출발점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대책 없이 화가의 내면세계를 보지 않도록, 해석과 해설을 위한 일종의 단서로 두는 것이다.

페르낭 크노프, 아크라지아, 1897,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페르낭 크노프, 아크라지아, 1897,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상징 또한 화가 본인에게서 비롯한다.

주관적이라는 이야기다. 같은 사물이라 해도 창작자 개인이 무슨 생각,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령 화가가 자기만의 세계를 그린 화폭 한편에 빨간 장미꽃을 그렸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장미꽃을 들고 고백한 적이 있다면 성공 여부에 따라 이는 환희 또는 상처의 감정을 의미하게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상징은 알레고리와는 다르다. 대상을 하나의 고정 의미로만 보는 알레고리적 시선으로 보면, 이 꽃은 정해진 꽃말에 따라 무조건 ‘열렬한 사랑’만을 뜻하게 될 테니까.

크노프는 이처럼 내면 탐구를 중시하는 상징주의에 계속해 빠져들었다. 내성적인 성격이 이를 더 부추겼다.

그는 어느덧 상징주의 대가가 돼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면 크노프에게 상징주의와 여동생은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가. 이제 거의 다 왔다.

내 마음의 문을 잠그고…

그림 속 상징이 꼭 사물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눈치 빠른 이라면 위의 한 줄을 읽고도 어떤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설마, 크노프가 여동생 마그리트를 상징의 ‘도구’로 쓴 건 아닐까.

그렇다면 크노프에게 마그리트는 무슨 상징이 될 수 있는가. 나에 대한 상징이 될 수 있다. 나의 혈육, 나와 가장 닮은 동시대의 존재로서. 크노프는 계속해 마그리트를 그렸지만, 사실은 그녀를 그린 게 아닌 본인을 투영하는 상징을 그렸다는 이야기다.

이 또한 아주 근거 없는 시선으로 밀어두기는 어렵다.

페르낭 크노프, 침묵, 1890, 종이에 파스텔, 87.8x44.3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페르낭 크노프, 침묵, 1890, 종이에 파스텔, 87.8x44.3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크노프의 <침묵> 속 인간은 그와 여동생의 얼굴을 합성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표정한 얼굴의 이 인물은 실제로도 성별을 짐작할 수 없는 외양을 갖췄다. 쉿. 손가락을 든 동작은 외려 작품에 비밀스러운 어떤 뜻을 녹인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자신과 여동생을 동일시하겠다는 힌트를 던졌을 수 있다는 의심까지 끌어오게 한다.

무게추를 여기에 맞추면 앞서 본 그림들의 해석도 달라질 수 있다.

마그리트과의 위험한 관계를 암시하는 게 아닌, 당시 본인의 자아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표현한 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스핑크스 또는 애무>는 자아의 분열과 이를 다시 이어붙이려는 마음, <테니스 또는 기억>은 비대해진 자아에 대한 고백, 이밖에 꽁꽁 싸맨 마그리트가 등장하는 그림 대부분은 외풍에서 차단되고 싶은 심경 등을 내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식이다.

페르낭 크노프, 내 마음의 문을 잠그다, 1891, 캔버스에 유채, 72.7x141cm, 노이에 피나코텍
페르낭 크노프, 내 마음의 문을 잠그다, 1891, 캔버스에 유채, 72.7x141cm, 노이에 피나코텍

크노프의 <내 마음의 문을 잠그다>도 비슷한 지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림 속 모델은 역시나 마그리트다.

그녀는 팔에 턱을 괸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친근함을 표하는 눈빛 내지 자세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녀 앞에 깔린 백합은 모두 말라버렸다. 벽에는 먼지가 묻었고, 나무도 곧 쩍 벌어질 만큼 낡은 모습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잠의 신 히프노스.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건 그의 얼굴을 빚은 조각상이다.

…바깥세상은 이처럼 텁텁하고 비루한 만큼, 차라리 히프노스와 함께 내면 세계로 깊이 빠져들겠다.

크노프가 여동생을 또 한 번 본인의 상징으로 삼고 이런 선언을 한 건 아닐까. 화폭 안 뒷배경은 당시 크노프의 작업실과 유사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페르낭 크노프, Listening to Schumann, 1883
페르낭 크노프, Listening to Schumann, 1883

그리고, 크노프는 그림 속 분위기처럼 실제로도 점점 더 고립을 자처했다.

그는 아예 1902년에 브뤼셀에 ‘자아의 성전’이라는 이름의 집도 꾸렸다. 흰색 배경 위 검은색 선과 금색 동그라미로 장식된 공간이었다. 그의 그림과 조각을 전시해둔 이 건물은 종교 시설같은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농밀한 고독을 꿈꿨지만, 세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크노프의 그림은 오직 작품성으로만 보면 모든 게 걸작이긴 했다. 만년의 그는 벨기에 최고의 화가라는 칭호도 받을 수 있었다.

그를 찾는 사람들로 ‘자아의 성전’은 뜻하지 않게 북적일 때가 많았다고 한다. 크노프는 1921년에 예순세 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크노프가 죽은 후 그의 개인적 기록 대부분은 불길에 처박혔다. ‘자아의 성전’ 또한 본모습을 오롯이 유지하지 못했다.

화가는 떠났지만, 그의 그림만은 지금도 스핑크스처럼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살아있을 당시 크노프가 여러 의혹을 놓고도 명징하게 못 박은 게 없다.

그렇기에 그림 속 상징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더욱 깊어지고만 있는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크노프는 여동생에 대한 위험한 사랑을 그린 걸까. 자신에 대한 남다른 성찰을 표현한 걸까. 아니면, 둘 다 맞거나 둘 다 틀렸을까.

귀스타브 모로, 추락하는 스핑크스, 1878년경
귀스타브 모로, 추락하는 스핑크스, 1878년경

참고자료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 숲

Fernand Khnopff, Michel Draguet, Mercatorfonds

서양미술사, E. H. 곰브리치, 예경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