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벤치마킹 ‘제작위’ 논의 수면 위로
리스크 분산· IP 산업 활성화 등 기대
창의성·글로벌 진출 한계…“반면교사 해야”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콘텐츠가 왕이다(Content is king).”
30년 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인터넷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오늘, 그의 말처럼 콘텐츠는 더없이 강력한 힘으로 글로벌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특히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콘텐츠 IP(지식재산권)의 힘이 빛났던 한 해였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넷플릭스 역대 시청수 최고 기록을 달성, 세계적 흥행에 성공하며 1조4000억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영화의 주요 소재인 ‘K-컬처’가 글로벌 대중의 유례없는 주목을 받은 가운데 관광은 물론 뷰티, ‘굿즈’를 비롯한 각종 소비재 등으로 그 온기가 확산됐다. 팬덤에 기반한 인기 IP가 단순한 콘텐츠 흥행을 넘어 타 산업까지 전이되는 오늘날 소비 방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검증된 IP로 무장한 이들 영화는 전 세계에서 역시나 1조원이 넘는 수익을 벌어들였다. 최근 ‘귀멸의 칼날’은 영화 ‘좀비딸’을 제치고 올해 국내 개봉작 흥행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올해 연이어 터진 애니메이션 작품의 흥행 덕분에 ‘IP 비즈니스’에 대한 콘텐츠 업계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하지만 ‘재주는 K-컬쳐가 넘고, 돈은 미국이 가지고 간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 ‘IP 주권’ 차원의 논의에서 나아가 우리나라도 인기 IP를 산업 전반의 비즈니스로 확장해 콘텐츠 수익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잘 만들고 잘 키운’ IP에 대한 국내 콘텐츠 업계의 갈증 속에서, 최근 업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한국형 제작위원회’다. 소설이나 만화 등 인기 IP를 TV판과 극장판, 더 나아가 머천다이징(상품 기획)까지 성공적으로 전개해 큰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일본의 ‘제작위원회’ 시스템을 우리나라에도 도입하자는 것이 ‘한국형 제작위원회’ 논의의 골자다.
30년 역사 日 제작위원회…국내 도입 논의 배경은?
‘제작위원회’는 30년 이상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영화, 드라마 제작 업계에 자리 잡은 투자 시스템이다. 작품 기획·투자 단계에서 방송국과 출판사, 제작사, 완구회사 등이 지분을 투자해 제작 비용의 리스크를 분담하는 방식이다. 제작위원회 참여 주체들은 각자 강점이 있는 사업을 통해 수익을 키우고, 이것은 전체 작품의 수익 상승으로 이어진다. 가령 출판사가 가진 IP로 제작사가 작품을 영상화하면, 방송국은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흥행을 지원하고, 완구사는 IP를 활용한 굿즈 제작 및 판매로 수익을 극대화하는 식이다.
이 같은 제작위원회 관련 논의가 국내에서 활발해지고 있는 배경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대중화와도 무관치 않다. 넷플릭스 등 자본력 있는 글로벌 OTT의 물량 공세로 콘텐츠 제작비가 높아졌고, 이는 다시 국내 제작 시장이 글로벌 OTT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같은 IP 확보 실패는 작품이 성공해도 국내 제작사가 충분한 수익을 누리지 못하는 사례가 덩달아 늘고 있다.
결국 다수의 주체가 투자에 참여함으로써 덩치가 큰 제작비를 원활히 확보하고, 동시에 투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제작위원회는 ‘IP 주권’이라는 ‘소프트파워’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대안으로 언급된다.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아셈볼룸에서 진행된 ‘K-콘텐츠IP 글로벌 포럼’에서 ‘한국형 제작위원회의 가능성’을 주제로 발제에 나선 이성민 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IP가 글로벌 OTT로 넘어가는 상황이 계속 누적이 되고, 국내에서 제작을 이어나갈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이 부족하다면 중장기적 경쟁력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면서 “산업 구조를 글로벌 시장에 맞추기 위해서는 제작 방식의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방송 광고로 돈을 벌던 드라마는 수익 모델이 흔들리면서 글로벌 OTT에 의존해 권리를 넘겨주고 있고, 애니메이션 제작사들도 적은 방영료 대신 IP를 상품화해서 돈을 버는 데 이마저도 한 회사가 모두 하고 있다”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스스로 꾸려나간 회사들이 지금까지는 성장했지만, 더 큰 수익 사업으로는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제작위원회의 가장 큰 장점은 리스크 분산이다. 지금은 제작사들이 “극장에 걸리는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면 회사의 명운을 걸어야 한다”고 토로할 정도로 작품 하나를 극장에 걸려면 큰 투자 비용과 다양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다수가 참여하는 제작위원회 시스템은 흥행 실패에 따른 위험을 한 회사가 모두 떠안지 않는다. 함께 모인 다양한 주체들이 실패의 리스크를 나누고, 동시에 각자의 최선을 다하면 모두가 이익이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반면 단점도 명확하다. 여러 주체가 모이니 의사결정이 어렵다. 또 목표가 ‘흥행’에만 매몰되다 보니 창의성·다양성보다 대중성만 좇는 작품 제작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고착된 ‘제작위원회’ 시스템을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해 한 기사를 통해 자국의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관련자가 지나치게 많아 기동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 최근 일본 콘텐츠 제작 업계에서는 기존 제작위원회 시스템에서 탈피하기 위한 노력이 포착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신드롬의 중심에 있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 맨’ 그리고 12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의 경우 제작위원회 기획을 맡은 애니플렉스를 필두로 원작을 보유한 슈에이샤,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유포터블(ufotable) 등 소수의 기업만 참여했다. 극장판 ‘체인소 맨’은 제작사 MAPPA의 단독 출자로 제작됐다. ‘국보’의 경우 제작위원회에 방송국이 참여하지 않았다.
중앙대학교의 박진희 영화연구자는 지난 9월 열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포럼 비프에서 “‘국보’는 TV 방송국이 주도하지 않으면 흥행할 수 없다는 관념을 깼다”면서 “애니플렉스가 속한 ‘귀멸의 칼날’ 제작위원회에도 방송국을 끼지 않았다. 새로운 방식을 지향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분석했다.
판권 외 수익 다변화…‘IP 비즈니스’ 확장 기회
그런데도 ‘한국형 제작위원회’의 필요성이 거론되는 이유는 미국, 일본과 달리 국내 ‘IP 비즈니스’가 아직 성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IP로 판권 이상의 수익으로 확장하려면 한국형 제작위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IP를 통해 부가 수익을 창출하고, 여러 산업으로 확장된 IP가 스스로 ‘슈퍼 IP’로 자리 잡는 기반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면 제작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제언이다.
실제 게임에서 출발한 ‘포켓몬스터’는 머천다이징에서 전체 수익의 60%를 차지하고, 인기 프랜차이즈인 스타워즈는 판권 외에 피규어, 광선검, 티셔츠, 기타 장비 등 굿즈 수입으로만 320억 달러(한화 약 46조원) 이상의 천문학적 수익을 벌었다. 심지어 일본 산리오의 대표 캐릭터인 ‘키티’는 콘텐츠 없이 IP 사업만으로 50년이 넘게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IP가 돈이 되는 시대이긴 하지만, IP 파워만으로는 그것이 수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전략적인 기획과 협업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손태영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IP 전략팀장은 “지금까지 우리는 머천다이징을 통한 수익을 간과한 것 같다”며 “부가 수익 창출은 IP 기획 단계에서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제작위원회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부터 부가 산업을 고민하는 프로젝트”라며 “작품을 만들고 나서부터 사업을 고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성민 교수는 “한국도 ‘케데헌’ 이후에 굿즈 이야기를 많이 한다”면서 “이제 일상에 콘텐츠 IP를 들여놓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여전히 걸림돌은 많다. 최근 일본의 사례만 봐도 ‘제작위원회’가 ‘IP 비즈니스’ 활성화를 위한 완벽한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콘텐츠의 주 무대가 전 세계로 확장하는 상황에서 제작위원회의 목표는 국내 흥행이 아닌, 글로벌 흥행이 돼야 하고, 따라서 IP 주권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제작위원회의 모델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글로벌 기업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표적 사례가 내년 7월 공개를 앞둔 애니메이션 ‘도굴왕’이다.
‘도굴왕’은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이하 나혼렙) 등을 보유한 레드아이스 스튜디오의 또 다른 흥행 IP이다. 이미 ‘나혼렙’을 일본에서 애니화하며 제작위원회 시스템을 경험한 레드아이스 스튜디오는 ‘도굴왕’의 경우 100% 국내 제작을 고집했다. 제작위원회 없이 출발했지만 ‘도굴왕’의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보고 모여든 기업들로 자연스레 제작위원회가 꾸려졌고, 여기에 애니 특화 글로벌 OTT인 크런치롤이 유통권을 사면서 글로벌 흥행의 기회도 잡았다.
장정숙 레드아이스 스튜디오 대표는 “‘도굴왕’이 성공한다면 IP 소유 주체와 제작사가 모두 100% 한국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가면서, 글로벌 시장에서도 성공하는 제작위원회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대했다.
핵심은 IP의 잠재력…“가능성 입증 필요”
제작위원회 성공의 가장 핵심이자 기본은 흥행 잠재력 높은 IP다. 성공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각 분야별 기업의 제작위원회 참여를 도모하는 것부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IP의 성공 가능성을 점치는 것 쉽지 않은 문제다. 여전히 높은 시청률, 시청 수에 머물러 있는 ‘IP 성공’에 대한 고정관념도 넘어야 할 산이다. 결국 ‘한국형 제작위원회’ 도입을 둘러싼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제도적 지원이 불가피하다.
드라마 제작사인 스튜디오S 김기준 PD는 “IP의 성공은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어떤 관점에서는 시청률이, 어떤 관점에서는 부가 사업으로 가치 큰 것이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제작사들은 드라마 제작에 매몰돼 있어 작품의 파급력, 영향력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시각의 균형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손태영 콘진원 팀장은 “제작위원회 구성과 기획 단계부터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위원회 파트너를 구하는 것부터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면서 “다만 기획이 얼마나 괜찮은지에 대한 입증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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