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으랴.”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660년 8월, 당나라와 손잡고 나당동맹을 맺은 후 소정방을 대장으로 하는 당의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 의자왕에게는 일본에 파견되어 있던 두 아들 풍과 선광이 있었는데 백제가 멸망하고 의자왕과 맏형 융이 당나라에 인질로 끌려가자 풍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귀국 길에 오른 반면 동생 선광은 일본에 남는다. 한편 일본의 사이메이 천황과 나카노 오에 태자(후에 덴지 천황)는 양국 왕실 간의 특수 관계를 고려해 풍의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고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으나 일본군이 금강 하구에서 맞붙은 나당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자 풍은 몸을 피해 고구려로 달아났다(663년, 백촌강 전투).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는데 이때 일본군과 동행하여 집단 망명을 선택한 백제 지배층 출신들은 “백제라는 이름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언제 다시 조상 묘가 있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으랴”라고 절규했다며,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의 엘리트 지배층은 약 3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일본 조정은 이들을 주로 오미(현 시가현) 남동부 일대에 1000여명, 나머지 2000여명은 동북 지방에 분산해서 집단거주시키며 교육, 문화, 건축, 국방 등 다방면에 걸쳐 지식인으로서 또는 지역 책임자로서 일본의 율령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겼다.
일본에 황금을 안겨준 의자왕 후손, 경복
일본 조정은 일본에 잔류한 선광 왕자 등 백제 왕족 출신에게 가와치국 가타노군(현 오사카부 히라가타시)에 주거지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곳은 백제계 도래인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다. 당시 일본의 백제계 도래인 가운데 백제라는 명칭을 가진 씨족에는 구다라노 아손, 구다라노 무라지, 구다라노 스쿠네 등이 있었는데 조정은 선광 일족에게만 유일하게 ‘백제왕씨(百濟王氏)’라는 성을 부여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구다라노 고니시키 우지’라 불렀는데, ‘구다라’는 백제, ‘고니시키’는 왕, ‘우지’는 씨족을 뜻한다. 선광은 이 백제왕씨의 시조가 되었다.
선광의 손자인 낭우는 당시 최고 교육기관의 수장 격인 다이가쿠노 가미(大学頭)를 맡아 학문 분야를 총괄하며 인재 양성과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셋째 아들이자 선광의 증손인 경복은 더욱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인물이었다. 그는 동북 지방인 무쓰(현 후쿠시마현, 미야기현, 아와테현, 아오모리현 일부)의 지역 책임자로 부임하여 무쓰 오다군(현 미야기현 도다군)에서 일본 최초로 금광을 발견하고 이를 채굴하여 황금 900량을 쇼무 천황에게 상납했다.
당시에 사찰 도다이지의 불상에 도금할 황금이 부족하여 당으로부터 황금 수입을 검토하던 천황은 크게 기뻐하며 경복을 일거에 7계급이나 특진시켜 종3위 궁내경 자리에 임명했다.
금광 발견자는 경복의 휘하에 있던 백제계 도래인 출신의 광산 기술자였는데 경복은 10년에 걸쳐 매년 900~1000량, 합계 1만400량의 금을 채굴했다고 한다.
오늘날 천황가와도 맞닿아 있는 백제왕씨
간무 천황(재위, 781~806년)은 “짐의 외갓집은 백제의 왕가다”라고 언급했는데 일본 역사서 ‘속일본기’에는 그의 모친 다카노노 니가사에 관해 “황비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간무 천황은 자기 모친이 백제계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백제계 도래인들을 유독 우대했는데 궁녀 가운데 최고위직인 종2위의 상시에는 경복의 손녀, 명신을 임명하고 총애했다. 명신은 천황의 총애를 등에 업고 여동생 명본과 혜신을 간무 천황 후궁으로, 조카 귀명은 간무 천황의 뒤를 잇는 사가 천황의 후궁으로 입궁시키는 탁월한 정치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 후지와라노 쓰구타다는 후지와라 씨의 시조인 후지와라 가마타리의 현손인데, 가마타리는 663년 백촌강 전투를 주도한 덴지 천황의 심복이며 친백제계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는 남편 쓰구타다의 출세 가도에도 큰 힘이 되어 쓰구타다는 부인 덕분에 총리 격인 태정관 자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명신은 덴무 천황 재위 기간에 백제왕씨가 황금기를 구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명신에서 시작한 백제왕씨의 천황가 진입은 그 후에 헤이안시대 시라카와 천황의 중궁, 호리카와 천황 등으로 맥을 이어 오면서 의자왕의 후손 백제왕씨는 오늘날 일본 천황가와도 접점을 지닌다고 한다.
이렇듯 일본은 백제가 멸망하자 자국으로 집단 망명해 온 백제 엘리트 지배층에게 문호를 개방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첨단 기술과 선진문물이란 보따리를 풀어놓게 했다. 그 결과 일본 사회는 문화적으로 풍요로워지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는 ‘인재를 방출한 나라는 쇠락하고 영입한 나라는 흥한다’는 역사의 철칙을 입증하는 사례다. 작금의 서방세계는 국경에 철책을 세우고, 이민자를 추방하는 등 개방성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 종착점은 쇠락이다. 관행에 젖어 그들과 보조를 맞출 때 우리도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greg@heraldcorp.com

![못 믿을 AI기업…검증하고 평가받게 하라[머브 히콕]](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7/news-p.v1.20260823.2391f1fe070840f39f8da5e471902ef7_T1.png?type=h&h=240)
![스크린 찢은 ‘댕’ 소리…드뷔시부터 고서방까지, ‘오디세이’ 음악사 [백스테이지]](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5/news-p.v1.20260819.fca8484b83c84c22bd209479c7a9a724_T1.jp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