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 서면제청 파장…“대통령 패싱” vs “대법원장 권한”

대법관 26명으로 증원…이재명 대통령 임기 내 22명 임명

대통령-대법원장 사이 대법관 사전 협의 명문 규정은 없어

“추천위 투명성 강화…대통령·대법원장 협의 기록 남겨야”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6월 8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4부 요인 회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6월 8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4부 요인 회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양근혁 기자]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재명 대통령과의 대면 없이 대법관 후보자를 서면으로 제청하면서 그간 ‘관행’으로 이어져오던 대법관 인선 절차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현직 대통령과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대법원장이 대법관 인선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이번처럼 양측이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대법원장이 서면으로 후보자를 제청한 것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로 대법관 제청 과정에서 대통령과 대법원장 간 사전 협의의 범위와 방식에 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향후 비슷한 충돌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데다 오는 2028년부터 대법관 정원이 대폭 늘어나는 만큼 관행에 의존해온 인선 절차를 보다 명확하고 투명하게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면제청 파장 계속… 대통령 패싱 vs 대법원장 고유 권한

23일 정치권과 법조계에서는 조 대법원장의 서면 제청을 둘러싼 파장이 계속되고 있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 3월 퇴임한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다음 달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 후임으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지난 18일 이 대통령에게 임명제청했다.

이번 제청은 조 대법원장이 이 대통령을 직접 만나지 않고서 서면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그간 대법관 임명 과정에서는 청와대와 대법원이 후보자에 대한 의견을 조율한 뒤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만난 후 최종적으로 제청하는 방식이 관례로 자리 잡아왔다.

특히 노 전 대법관 후임 인선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대법원이 수개월 동안 이견을 좁히지 못한 상황에서 서면 제청이 이뤄지면서 양측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노 전 대법관 후임 후보는 지난 1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추천위)가 4명으로 압축해 조 대법원장에게 추천했지만 이후 제청은 이뤄지지 않았다. 청와대와 대법원이 1순위로 염두에 둔 후보가 달라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헌법 제104조 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다. 법원조직법에도 같은 내용의 규정이 있다. 대법관 임명에는 대법원장의 제청과 국회 동의, 대통령 임명이라는 세 주체의 권한이 맞물리는 구조다. 다만 대법원장이 대통령에게 어떤 방식으로 후보자를 제청해야 하는지, 제청에 앞서 대통령과 어떤 협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명문의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이번 서면 제청 논란을 두고도 해석이 엇갈린다. 여권에서는 조 대법원장이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충분한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후보자를 제청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관례를 깨고 사실상 대통령을 ‘패싱’했다는 주장이다. 반면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사법부 독립을 위해 헌법이 부여한 고유 권한인 만큼 대통령과의 사전 협의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
조희대 대법원장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

과거에도 이견은 존재했지만 접점 찾은 뒤 제청·임명

법조계에서는 조 대법원장이 서면 제청이라는 이례적인 방식을 택한 것은 대법관 인선에서 대법원장의 헌법상 제청권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후보자를 두고 사전에 조율하는 관행이 자칫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제약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결정이라는 분석이다.

대법관 인선을 둘러싼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이견은 과거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임 정부에서 임명돼 임기가 남아 있는 대법원장과 새 정부 대통령이 대법관 인선 방향을 놓고 신경전을 벌인 사례들이다. 2003년에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임명된 최종영 당시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임을 제청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갈등이 불거진 바 있다. 2023년에도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과 윤석열 대통령실 사이에 조재연·박정화 전 대법관의 후임 인선을 두고 이견이 노출됐었다.

다만 과거에는 양측이 최종적으로 접점을 찾은 뒤 제청과 임명 절차가 진행됐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후보자를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상황에서 조 대법원장이 서면으로 후보자를 제청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제는 이번 사례가 일회성 충돌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제청에 앞서 거치는 협의의 범위와 방식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면 제청이 새로운 선례로 남게 됐기 때문이다. 향후 양측의 의중이 엇갈릴 때마다 사전 협의 여부와 제청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되풀이될 수 있다.

또한 대법관 증원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현재 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인 대법관 정원은 2028년부터 순차적으로 26명까지 늘어날 예정이다. 기존 대법관들의 임기 만료에 따른 후임 인선까지 겹치면서 이 대통령은 임기 중 최대 22명의 대법관을 임명하게 된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대법관 인선이 집중되는 시기를 앞두고 관행에 의존해온 대통령과 대법원장 간 사전 협의 방식이 언제든 다시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이다.

갈등 뇌관은 그대로…“논의 투명성 강화 필요”

법조계에서는 이를 계기로 대법관 후보자 추천부터 제청·임명까지 이어지는 인선 과정의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는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가 3~4배수로 후보자를 추린 뒤 추천하고 대법원장이 최종 후보자를 대통령에게 제청하는 구조지만, 추천위 내부의 논의 과정이나 대법원장이 최종 후보자를 선정하는 과정은 외부에서 들여다보기 어렵다. 법원조직법 41조의2 제1항은 ‘대법원장이 제청할 대법관 후보자의 추천을 위해 대법원에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둔다’고 규정하고 추천위원회 구성과 운영 등에 관한 사항을 대법원규칙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는데, 대법원규칙은 회의의 절차와 내용 등을 공개하지 않도록 정하고 있다. 또 전·현직 위원으로 하여금 심사사항 등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다.

대통령과 대법원장 사이의 사전 협의 부분은 아예 명문의 규정도 없다.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공식 절차가 아닌 관행에 의존하다 보니 협의가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이뤄져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지적이다. 사전 협의 과정에서 대통령의 의사가 과도하게 반영될 경우 대법원장의 헌법상 제청권을 제약한다는 논란이 생길 수 있는 반면, 아무런 협의 없이 제청이 이뤄질 경우 대통령의 임명권이 형식화된다는 반발이 나올 수 있다. 각각의 헌법상 권한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인선 과정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절차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추천위 구성에서의 대표성과 논의의 투명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학계나 특정 단체의 대표로 추천위원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개인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각 조직에서 간부들과는 협의하는 절차 정도는 거쳐야 한다. 위원들이 더 책임감을 갖고 추천위 인선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또한 “대법원장이 대통령과 협의를 거치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협의가 밀실에서 진행된다는 문제가 있다”며 “양측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했다면 회의록 정도는 남겨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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