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빈패스트, 자국 EV 시장 사실상 장악
사우디·멕시코·브라질도 자체 브랜드 육성
낮은 인건비·정부 지원 앞세워 가격 경쟁력 확보
관세장벽 강화 가능성…韓 기업 현지 협력 필요
[헤럴드경제=정경수 기자] 엔진과 변속기가 사라지자 자동차 산업의 ‘높은 문턱’도 낮아지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자체 브랜드 빈패스트가 전기차 시장의 99.9%를 차지했고, 사우디아라비아·멕시코·브라질 등도 자국 전기차를 키우고 있다. 신흥국의 로컬 전기차가 저가 공세에 나설 경우 기존 완성차 업체들의 경쟁 부담도 커질 전망이다.
31일 한국자동차연구원이 발간한 ‘신흥국의 자체 전기차 브랜드 육성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 자체 브랜드 빈패스트는 지난해 자국 전기차 시장에서 99.9%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튀르키예 토그는 같은 해 현지 전기차 시장에서 19.4%를 차지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멕시코, 브라질, 모로코 등도 자체 브랜드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신흥국들이 전기차를 새로운 산업 육성 기회로 보는 것은 자동차의 경쟁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연기관차는 엔진과 변속기를 비롯해 약 3만개의 부품이 필요하지만 전기차는 약 1만2000개로 줄어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핵심 기술도 엔진에서 배터리와 전장, 소프트웨어(SW)로 이동하면서 기존 완성차 업체가 쌓아온 기술 장벽이 일부 낮아졌다.
가장 앞선 사례는 베트남이다. 빈패스트는 당초 내연기관차를 생산했지만 모기업 빈그룹의 자금 지원과 정부 정책을 기반으로 전기차 전문 업체로 전환했다. 베트남 내 빈패스트 전기차 판매량은 2024년 8만7000대에서 지난해 17만5000대로 두 배가량 늘었다.
충전 인프라도 계열사가 장악했다. 빈그룹 자회사 V-그린은 2024년 기준 베트남 전기차 충전시장의 약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빈패스트 차량을 중심으로 충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전기차 최초 등록세 면제와 특별소비세 감면을 지원하는 동시에 수입 전기차에는 최혜국대우(MFN) 기준 70%의 관세를 적용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국부펀드(PIF)를 앞세워 자체 전기차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PIF는 2022년 대만 폭스콘과 함께 전기차 브랜드 ‘시어’를 설립했다. 시어는 올해 4분기 첫 SUV와 세단 생산을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킹 압둘라 경제도시(KAEC)에 통합 생산단지를 짓고 있다.
완성차뿐 아니라 인력과 부품까지 공급망을 함께 만드는 전략이다. PIF는 자동차 전문인력 양성기관과 부품 제조 합작사 구축에 참여하고 있으며 피렐리와 타이어 현지 생산법인도 세웠다. 사우디에서 생산하는 석유화학 원료를 활용해 원료에서 부품, 완성차로 이어지는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중남미에서는 현지 사정에 맞춘 저가형 전기차 개발이 두드러진다. 멕시코 정부가 주도하는 브랜드 ‘올리니아’는 9만~15만페소(약 735만~1225만원) 수준의 전기차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 충전 인프라가 부족한 현지 여건을 감안해 일반 가정용 110V·220V 콘센트에서도 충전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브라질 스타트업 레카르는 현지에서 널리 쓰이는 에탄올을 연료로 활용할 수 있는 주행거리연장형 전기차(EREV)를 개발 중이다. 브라질은 2024년 기준 승용차의 약 85%가 휘발유와 에탄올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플렉스 퓨얼 차량이다.
기존 자동차 생산기반을 활용해 자체 브랜드를 키우는 국가도 있다. 튀르키예는 13개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생산시설을 갖춘 유럽 5위 자동차 생산국이다. 자체 브랜드 토그는 지난해 전기차 3만9000대를 팔아 테슬라와 BYD를 제치고 현지 전기차 판매 1위에 올랐다.
현지 부품 비중도 빠르게 높이고 있다. 토그의 현지화율은 2023년 51%에서 지난해 약 75%까지 상승했다. 중국 배터리 업체 파라시스와 합작사를 설립해 배터리 팩과 모듈도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다.
자동차연구원은 이런 신흥국 브랜드 확산이 전기차 가격 경쟁을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선진국보다 낮은 인건비와 정부 보조를 활용해 저가형 전기차를 대량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무역장벽도 높아질 수 있다. 튀르키예는 지난해 9월부터 유럽연합(EU) 및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 이외 국가에서 수입되는 차량에 추가관세 30%를 부과해 총 관세율을 40%까지 높였다.
다만 신흥국의 약점도 뚜렷하다. 자체 완성차 생산기반을 확보하더라도 배터리 등 핵심부품 공급망을 단기간에 내재화하기 어렵고 충전 인프라와 전력망 역시 전기차 보급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국가가 많다.
이는 국내 부품업체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신흥국 완성차 업체의 양산 경험과 부품 조달 기반이 아직 취약한 만큼 국내 기업이 배터리와 전장부품뿐 아니라 충전 인프라 등 신규 공급망에 진입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정준하 자동차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신흥국 로컬 EV의 부상은 경쟁 구도의 변화이자 동시에 새로운 고객·기술협력 시장의 창출을 의미한다”며 현지 업체와의 공동개발·합작, 완성차 기업과의 동반 진출 등을 통해 초기 공급망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kwat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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