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이 창업(1992년) 2년 후인 지난 1994년 공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창업 이후 34년이 지난 2026년 코스맥스는 올해 매출 3조원을 바라보는 초대형 ODM 업체로 성장했다. [코스맥스]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이 창업(1992년) 2년 후인 지난 1994년 공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창업 이후 34년이 지난 2026년 코스맥스는 올해 매출 3조원을 바라보는 초대형 ODM 업체로 성장했다. [코스맥스]

창업 1년 만에 일본 기술제휴사와 갈림길…자체 연구개발 선택

2000년대 로드숍 성장기 대량 제품개발 수요 덕 ODM 경쟁력 축적

작년 매출 2조3988억·올 상반기 1조4769억…연내 매출 3조 가시권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연구소장을 당장 해고하지 않으면 제휴 관계를 끊겠습니다”

지난 1992년 화장품 제조사 한국미로토(현 코스맥스)의 사무실에서 청천벽력같은 전화를 받은 이는 이제 막 회사를 창업한 46세의 대표이사 이경수였다. 통화상대는 기술제휴처였던 일본 화장품 OEM 기업 미로토사의 사장이었다. 한국미로토가 자체적으로 연구소장을 채용하고 기술연구소를 꾸렸다는 소식이 일본 원천기술 기업에 들어간 것이었다.

일본 미로토사의 사장은 “R&D는 우리가 다 해줄 텐데, 비싼 연봉의 연구소장을 왜 데리고 있냐”며 연구소장 해고를 요구했다. 창업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기업에 자체 기술이 미미했던 한국미로토에겐 회사의 문을 닫느냐, 마느냐를 가를만한 중대 위기 상황이었다.

이경수 회장은 당장 일본으로 날아갔다. 이틀에 걸쳐 미로토사 대표를 만났다. 이 회장은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호소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연구소장이니 2~3년 뒤에 내보내겠다”고도 제안했다. 하지만 미로토사의 입장은 완강했다. 일본 미로토사의 기술제휴를 계속 받거나 아니면 연구소를 설립하거나, 둘 중 하나만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연결 매출 3조를 바라보는 세계 1위 화장품 ODM 기업으로 성장한 코스맥스지만 창업 초기의 이 회장에겐 당시가 생존을 건 갈림길이었다고 자신의 저서 ‘같이 꿈을 꾸고 싶다’를 통해 회상했다. 이 회장은 “결국 연구개발을 조금 뒤로 미루고 미로토와 제휴 관계를 이어갈 것이냐, 당장 닥칠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연구개발 및 생산 전문회사라는 비전을 향해 스스로 체력을 키워나갈 것이냐의 갈림길에 섰다”고 썼다.

고심 끝에 이 회장은 제휴 중단을 선택했다. 그의 판단은 하나였다. 연구개발 능력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이경수 회장은 “당장의 어려움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체력을 키워야만 진정한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창업 초기의 선택이 곧바로 실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코스맥스는 이후 연구개발 인력을 늘리고 화장품 처방을 축적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국내 화장품 유통시장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독자 연구개발 조직의 힘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코스맥스는 지난 2006년 11월 상장했다.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코스맥스]
코스맥스는 지난 2006년 11월 상장했다.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코스맥스]

2000년대 들어 더페이스샵, 미샤, 이니스프리, 에뛰드 등 로드숍 브랜드들이 빠르게 늘면서 화장품 브랜드들이 짧은 기간에 여러 종류의 신제품을 출시해야 하는 시장이 형성됐다. 코스맥스는 한 고객사로부터 3개월 안에 250개 품목을 개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코스맥스가 창업 초기부터 확보한 연구인력과 축적된 처방은 이 시기 생산능력과 함께 탁월한 경쟁력으로 작용했다. 고객사가 요구하는 제품을 생산만 하는 OEM에서 제품의 처방과 제형까지 개발하는 ODM 사업이 본격적으로 커진 것도 이 무렵이다.

실적도 뒤따랐다. 2000년대 이전 연매출 100억원 수준이었던 코스맥스는 2008년 연매출 1000억원을 넘어섰다. 중국을 비롯한 해외 생산기지 확충과 국내 화장품 브랜드 성장도 외형 확대에 영향을 미쳤다.

수출 규모도 커졌다. 코스맥스는 2015년 ‘5000만불 수출의 탑’을 받았고 이 회장은 같은 해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2016년에는 화장품 ODM 업계 최초로 ‘1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2024년에는 다시 ODM 업계 최초로 ‘2억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30여년 전 연구소 존폐를 놓고 고민했던 회사의 매출 규모는 이제 조 단위로 커졌다. 코스맥스의 2025년 연결 매출은 2조3988억원으로 전년보다 10.7%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 연결 매출도 전년 동기보다 22% 늘어난 1조4769억원을 기록했다. 상반기 매출 증가율로만 보면 코스맥스는 올해 처음으로 연결 매출 3조원에 근접할 가능성도 커졌다.

최근 성장은 K뷰티 시장의 구조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과거 대형 화장품 브랜드 중심이었던 고객군이, 해외 시장을 직접 공략하는 국내 인디 브랜드로 넓어지면서 여러 고객사의 제품을 동시에 개발·생산할 수 있는 ODM 업체의 역할이 커졌다. 올해 2분기 코스맥스 한국법인 매출이 처음으로 5000억원을 넘어선 배경에도 인디 브랜드 고객사의 해외 판매 확대가 있었다.

코스맥스는 현재 연구개발과 생산에 더해 브랜드 기획 등을 지원하는 OBM(제조업자 브랜드 개발·생산) 영역까지 사업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제품 개발과 생산 과정에 적용하고 해외 법인을 통해 현지 고객사를 확보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창업 초기 일본 기업과의 기술제휴 중단을 놓고 당시 선택 자체를 현재의 기업가치와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다. 이후 중국 진출과 국내 화장품 시장 성장, K뷰티 수출 확대 등 여러 요인이 코스맥스의 성장 과정에 더해졌다. 다만 연구개발을 외부에 의존할지 자체 역량으로 가져갈지를 결정해야 했던 1992년의 선택은 이후 코스맥스가 ODM 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사업 방향을 정한 초기 분기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 [코스맥스]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 [코스맥스]

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