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정부는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안보체제 정착을 위해 힘을 합쳐도 아쉬운 상황에 점점 더 첨예한 갈등을 보이고 있다. 양국이 지난 50년 동안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함께 구축해온 업적을 감안하면 대립 구도의 최근의 한일관계는 지극히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엄중한 현실 속에서 두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상호 이해와 신뢰를 회복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냉랭한 한일관계로 양국 간 새 비전을 만들기가 녹록치 않다면 1998년 10월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도쿄정상회담에서 발표한 ‘21세기의 한ㆍ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하 ‘선언’)’이라도 발전적으로 계승하길 바란다. 11개 항목의 전문과 43개 항목의 실천계획을 담은 선언은 20세기 한일관계를 총괄하고 21세기 한일관계를 설계하는 문서로, 양국간 상호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평화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역사적 결단이 담겨 있다.
지난해 10월 선언 20주년을 기념하며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는 “김대중, 오부치와 같은 정치 지도자와 양국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한일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며 “한일양국은 다시 선언의 본질에 따라 국가관계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미래비전을 설정하는데 의지를 모아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한일 현직 정상이 선배의 뜻을 따라 세계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미래지향적 협력동반자관계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가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양국 대립이 격화돼 정상의 다짐이 공수표로 끝날 공산이 커졌다. 이에 새삼스럽지만 필자는 선언의 본질을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선언에는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방향이 제시돼 있다.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국 국민에게 큰손해와 고통을 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수용하고 평가함과 동시에 양국이 과거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둘째 선언에는 상호 이해와 신뢰가 담겨 있다. 양국 정상은 오랜 역사를 통해 교류와 협력을 유지해온 한국과 일본이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각 분야에서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켜왔으며, 이 협력관계가 서로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오부치 총리는 한국이 국민의 노력으로 민주화를 달성하고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한 것에 경의를 표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국제사회 평화와 번영을 위해 수행해온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더불어 선언에는 한일 뿐만 아니라 세계가 지향할 목표와 가치도 제시돼 있다.
선언 이후 2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은 우호와 반목을 되풀이했지만 선언의 큰 줄기는 지켜져왔다. 게다가 선언은 한국과 일본을 넘어 세계의 바람까지 담았다는 점에서 존중돼야 한다고 본다. 양국 정상의 용기와 결단 없이 한일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 선언에서 교훈과 지혜를 얻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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