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과 2014년은 별반 다르지 않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의 판소리 영화 〈서편제〉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같은 해 처음 나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주요 대형서점에서 60주 연속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1993년 새롭게 출시된 전통음료 ‘비락 식혜’는 10대 히트 상품에 선정되면서 코카콜라·환타·델몬트 오렌지쥬스 등을 밀어내고 편의점 냉장고를 빠르게 채웠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를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그렇게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 1997년 11월 27일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다. 소위 IMF 경제위기다. 여태까지 없었던 노숙자가 길거리에 나타났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청년실업과 조기퇴직이라는 말이 새로 등장했다. 세계화를 선언했을 때부터 사실 불안했다. 남부끄러운 나이스로 나이키를 이길 수도 없었지만 아놀드 파마 앞에 아놀드 파라솔은 내 놓을 수도 없었다. 〈서편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비락 식혜’는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위기에서 비롯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4년 같은 일이 반복된다. 7월 30일 개봉한 영화 〈명량〉은 9월 3일 누적관객수 1,700만 명을 돌파한다. 1,362만 명을 동원했던 〈아바타〉의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경신한다. 제1권 출간 20년째를 맞은 2013년부터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을 출판하기 시작한다. 2014년 김보성의 ‘으리’ 광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젊은 세대들도 비락식혜를 알게 된다. 이처럼 1993년과 2014년은 별반 다르지 않다.
왜 이런 현상은 계속되는가? 대한민국은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적이 없다. 국가 부도 사태로 상처 입은 자긍심을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자랑스러워야 할 대한민국이 왜 자랑스러운지 잘 모른다. 경제 위기는 국민정체성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 8월 27일부터 9월 27일까지 한 달 동안 문화부에서 조사한 ‘한국인의 의식 및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83.9%에 달하는 국민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답했다. 1996년 조사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던 수치가 처음으로 반등하여 80%대를 넘었다. 우리 역사가 자랑스럽다고 응답한 사람도 83.3%나 됐다. 1996년 첫 조사 대비 28.3% 증가했다.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역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1592년 왜와 7년 전쟁을 치른다. 조선이 쑥대밭으로 변한다. 1636년 거듭 쳐들어온 청에게 무릎을 꿇는다. 10만에 달하는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다. 삼연 김창흡과 두 제자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은 삼천리를 두루 걷고 시와 그림으로 금수강산을 표현한다. 조선을 주제로 한 서사(narrative)를 완성한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문명국가가 조선이라는 자의식, 곧 조선중화주의는 이렇게 진경시대를 열었다. 결국 절체절명의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고 조선중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땅을 두발로 걸어서 금수강산을 재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같은 조사에서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와 대중음악 등 대중문화가 우수하다는 응답비율은 92.8% 매우 높았다. 2008년 첫 조사 때보다 10% 상승한 수치다. 지금 한국사람들은 20년 동안 풀지 못한 숙제를 풀고 있다. 나도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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