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나일론 생산 ‘섬유업계 대부’ “기업은 사회공기업” 올곧은 신념 경총회장으로 노사관계 선진화 이끌어
스포츠 열성적 후원자 큰 족적 남겨 개인적으론 검소하기로 유명
“기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종업원 모두의 사회생활의 터전이며 원천입니다. 그래서 기업의 부실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며 배임입니다.”
지난 8일 노환으로 별세한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1981년 방송사 강연에서 한 말이다. 기업은 곧 ‘사회의 공기업’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고인의 신념이 담겨있다. 이 명예회장은 1992년 기업인 최초로 국내 최고 훈장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경북 영일 출생인 이 명예회장은 부친인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1957년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국내 최초로 나일론사를 생산해 한국 섬유사에 큰 획을 그었다. 당시는 나일론사가 큰 인기를 얻어 품귀현상까지 빚었던 시기다. 한국나이롱은 1963년 국내 최초로 나일론사 공장을 준공해 1967년 공장 증설을 거듭하며 크게 도약했다. 이어 폴리에스터사 제조에도 착수해 1960~70년대 화섬업계의 발전을 이끌었다.
1977년 코오롱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나일론사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게 되자 사업다양화와 제품다양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격동의 1980년대 들어서는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사업, 1990년대 정보통신사업, 유통업 진출해 그룹을 육성했다.
이 명예회장은 1982년부터 14년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았다. 당시는 노사갈등이 첨예했던 시기여서 노사문제를 담당하는 경총 회장직 역임을 모두 꺼려했다. 고인은 1989년 경제5단체가 참여하는 경제단체협의회 창설을 주도했고 1990년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석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시켰다.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1993년에는 한국노총과 상호대등한 위치에서 사회적합의를 이뤄내 한국 노사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명예회장은 한국 마라톤의 열성적인 후원자이기도 했다. 1985년부터 매년 ‘전국 남녀고교 구간마라톤대회’를 주최하는 한편, 코오롱마라톤팀을 창단해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황영조 선수와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이봉주 선수가 이 명예회장의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마라토너다. 이외에도 대한농구협회 회장, 대한골프협회 회장, 2002 한일월드컵 초대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고인은 생전 “후손에게 풍요로운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은 기업가의 사명”이라며 사회복지관을 건립하고 청소년 수련마을을 개원했다. 대외적으로 유독 ‘통’이 컸지만 개인적으로는 검소하기로 유명했다. 50여년간 신은 슬리퍼를 비서실에서 새 것으로 바꿨다가 이 명예회장에게 ‘멀쩡한 것을 왜 버리느냐’고 야단을 된통 맞은 일은 코오롱그룹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다. 고인은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그 슬리퍼를 최근까지 사용했다.
이 명예회장은 된장찌개와 칼국수, 수제비 등 대표적인 서민음식을 즐겼다. 반찬이 남으면 다른 반찬을 더 시키는 일도 없었다. 삼복더위는 부채와 선풍기로 버텼고, 국산 중저가 브랜드인 맨스타 트렌치코트를 10년 넘게 입었다. 출장지에서도 수행비서들과 함께 방을 쓰며 숙박비를 줄이고, 등산이나 낚시에 갈 때는 꼭 도시락을 싸갔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김기춘 비서실장 등 정ㆍ재계 인사들의 조문행렬이 잇따랐다. 전경련은 논평을 내고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현대화와 노사간 산업평화를 선도했던 이동찬 명예회장이 별세하신 것에 대해 경제계는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김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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