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보임 “전 세계 문화에 대한 공격”
ESC “러 참가는 대회 더럽히는 것”
親푸틴 음악인 공연 하나둘 멈춰
정치가 대립과 반목으로 내달리고, 전쟁이 삶을 위협할 때 음악은 평화로 향하고 있다. 예술가에게 국적은 있지만, 예술엔 국적도 국경도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자, 음악계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계적 거장들이 러시아를 규탄하고, 우크라이나를 위로하고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슈타츠카펠레 베를린의 공식 SNS를 통해 공식 성명을 내고, “놀라움과 충격, 깊은 우려를 표한다”며 음악가로서 참담한 현실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은 한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평화로운 공존의 문화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고 강조하며 “음악의 경험 속에서 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서로를 대립하지 않게 하기 위해 파괴보다는 창작에 힘을 다해 노력하겠다”며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의 연대와 연민으로는 이 재앙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며 “현재 우리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우리의 언어는 음악이며 언제 어떤 형태로 진행될지 곧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유태인 음악가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음악으로 세계 평화에 일조할 것을 천명하며 각국의 내전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사회운동가다. 그는 중동 갈등 해소를 위해 아랍과 이스라엘 청소년들이 어우러진 관현악단 ‘웨스턴-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설립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에 앞장서는 행보로 지난해 제25회 만해대상 평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 역시 같은 날 페이스북에 “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함께 있다. 우크라이나와 세계를 위한 평화”라는 글과 함께 그가 참여한 체르노빌 방사능 유출 참사 이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알렉세이와 샘(Alexei And The Spring)’ OST를 공유했다. 다큐멘터리는 방사능 오염으로 대다수가 떠나고 55명의 노인과 알렉세이라는 청년만 남게 된 마을에서 삶의 진정한 풍요로움과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는다. 사카모토는 이 음악을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다.
체코 필하모닉 음악감독이자 지휘자인 세묜 비치코프는 침공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고,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멜니코프는 공연에 앞서 “러시아 사람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갖게 한 이들에게 화가 난다”라고 말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나 친(親) 푸틴 음악인들의 공연도 하나둘 멈추고 있다. 최근 진행한 빈필하모닉의 공연에선 ‘친 푸틴’ 계를 자처한 음악가들이 공연이 취소되고,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협연으로 대체됐다.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 따르면 지난달 25~27일로 예정됐던 러시아 국적의 지휘자인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와 빈필하모닉 협연은 이번 침공 사태로 인해 취소됐다.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를 비롯해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 등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한 ‘친 푸틴’ 음악가다. 두 사람은 앞서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침공해 합병하자 이를 지지하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성명에 함께 했다.
이러한 이유로 빈필하모닉 공연에선 두 사람을 대신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인 야닉 네제 세갱과 한국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무대에 올랐다. 카네기홀은 조성진에 대해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하며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연을 위해 독일 베를린에서 뉴욕으로 온 것에 감사하다”라고 밝혔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볼쇼이 발레단의 세계 공연도 취소되고 있다. 영국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올 여름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영국 공연을 취소한다고 공지했다.
유럽 최대 음악 축제로 오는 5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SC)’도 러시아 쪽 출연진들의 참가를 제재했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유럽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러시아의 참가는 콘테스트의 설립 배경과 의미를 훼손한다는 판단이다. ESC를 주관하는 유럽방송연맹 노조는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고려할 때 올해 대회에 러시아를 참가시키는 것은 대회를 더럽히는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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