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군국주의 부활의 상징…일본 야스쿠니신사

A급 전범 순국선열 둔갑 야스쿠니신사 광기어린 파시즘·군국주의의 희생양 나라위해 산화한 영웅 미화에 ‘경악’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돌출발언 아닌 뿌리 깊은 왜곡된 역사인식이 주원인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있을까 의문이…

[도쿄=이해준 문화부장] 미국 대륙횡단 여행을 마친 다음 마지막 여행지인 일본으로 향했다. 9개월 전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세계여행이 인도를 거쳐 유럽~남미~북미~일본으로, 드디어 지구를 한 바퀴 돈 것이다. 도쿄 나리타공항엔 3개월 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헤어져 귀국했던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아내는 큰아들의 군 입대와 작은아들의 공부 뒷바라지 등에 여념이 없었고, 나는 혼자서 남미와 미국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마지막 여정은 아내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만나 함께 여행한 다음 같이 귀국하기로 했던 것이다. 뜨거운 포옹으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도쿄 시내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장기 해외여행을 하게 되면 많은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는 민족주의랄까 국가주의적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라,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일종의 ‘코스모폴리탄’, 즉 민족이나 인종을 구별하지 않는 범세계주의자 또는 ‘자유로운 세계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유럽은 국가의 틀을 뛰어넘어 유럽연합을 만드는 등 세계도 진화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젖어 있다가 만난 일본의 모습, 특히 야스쿠니신사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곳은 퇴행의 땅이었다.

▶침략자를 추모하는 야스쿠니=일본 도착 다음날 숙소 인근의 우에노공원(上野公園)과 시타마치풍속자료관(下町風俗資料館) 등을 돌아본 다음 도쿄 중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로 향했다. 일요일 낮이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신사를 찾고 있었다. 동북아 역사 갈등의 진원지, 일제의 침략을 부정하고 미화하는 역사왜곡의 현장이라 그런지 야릇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마침 매년 7월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미타마축제를 앞두고 진입로에 수많은 등이 매달려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진입로를 포함해 신사 곳곳에 매달린 등이 3만개에 달한다고 했다. 일본 전통의 기모노 의상을 입은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야스쿠니 신사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메이지유신 당시인 1869년이다. 제국 건설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로 황실의 명에 의해 전국에 건설한 신사 가운데 하나였다. 최초의 명칭은 쇼콘사(招魂社)였으나 1879년 황실이 황궁 근처, 도쿄 중심부에 자리잡은 이 신사를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의 야스쿠니신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호국신사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야스쿠니에는 일본 제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위패를 등록했다. 지금 등록된 희생자는 모두 246만6532명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일제의 침략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등록돼 있다. 246만여명의 등록자 가운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사망자가 213만3915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일전쟁 19만1250명, 러일전쟁 8만8429명, 청일전쟁 1만3619명 등 대부분 일제의 침략전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이다. 거기에 12명의 A급 전범은 물론 2차 대전 이후 사형선고를 받은 전범자들도 등록돼 있다.

야스쿠니는 일본 특유의 종교관과 결합한 정치문화의 산물로 2차 대전 직후 연합군총사령부는 이의 폐해를 막기 위해 정치와 종교의 분리 및 국가신사의 폐지를 단행했다. 야스쿠니에 대해서도 단순한 종교시설이나 민간시설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는데, 당시 일본은 민간시설로의 변화를 택했다.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민간시설이지만, 호국신사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고,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를 필두로 총리와 각료,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이 참배하면서 끊임없는 역사갈등을 초래하는 곳이 되었다.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국민교육장=야스쿠니 신사를 돌아 유슈칸(遊就館)으로 향했다. 야스쿠니가 추모시설이라고 한다면 유슈칸은 국민에 대한 정신교육 현장이었다. 야스쿠니가 충격적인 곳이었다면 유슈칸은 경악할 만한 공간이었다. 침략을 부정하고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미화하는가 하면 전쟁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유슈칸에서는 일제 침략 당시의 군가 CD를 편집해 버젓이 판매하고 있었다. 욱일승천기가 크게 그려진 군가 CD가 섬뜻하게 느껴졌다. 천황에 대한 충성과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파시즘 군가를 어떻게 지금 다시 판매하고 있는지, 기가 막혔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가제 공격에 사용된 항공기와 폭탄 등이 전시돼 당시의 희생을 영웅적인 것으로 미화하고 있었다.

유슈칸에서는 ‘우리들은 잊지 않는다(私たち忘れない)’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들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개전 70년 기념 다큐멘터리였다. 다큐멘터리는 1800년대 말~2차 대전의 역사를 유럽과 미국의 아시아 침략에 맞서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일제의 조선과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일본은 침략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제의 약탈과 만행, 반(反)식민 투쟁에 대한 잔인한 탄압, 이로 인한 피식민지 국민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됐다. 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침략으로 인한 주변국의 고통에 대한 반성은 더더욱 없었다. 또 2차 세계대전에 동원된 전투기와 함정, 무기류와 당시 희생된 일본인들의 사진도 전시돼 있었다. 그들은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광기에 의해 희생된 안타까운 영혼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수호를 위해 몸을 던진 영웅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잊을 만하면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은 돌출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왜곡된 역사인식의 발로였다. 그들은 이를 감추고 있다가 때가 되면 한 번씩 표현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은 그들의 뼛속 깊이 박혀 있었고, 그것은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에 침략을 주도한 제국주의자들의 인식과 같은 것이었다.

▶최소한의 도덕심도 왜곡하는 퇴행의 땅=야스쿠니를 돌아보면서 2차 세계대전 때 같은 침략세력이었던 독일이 떠올랐다. 베를린 장벽엔 파시즘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독일은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을 미래의 땅, 평화의 교육장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은 자신의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 미래지향적 가치를 실천함으로써 전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럽의 지도적인 국가로 새롭게 등장, 유럽통합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60여년 전의 왜곡된 정신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듯했다.

일본 천황과 그 가족의 거주지인 고쿄(皇居)는 야스쿠니에서 길 건너에 있었다. 과거 에도성(江戶城)이었던 곳으로, 천황은 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최고 권력자이자 제정을 주관하는 신적인 존재로 숭배됐다. 병사들은 ‘천황폐하만세’를 부르며 전장에 나갔다. 천황이 일본 파시즘의 뿌리였던 것이다. 종전 이후 연합군사령부는 천황제의 폐해를 우려해 신적인 지위를 박탈하고 내각의 승인에 의해서만 형식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지위를 약화시켰으나, 아직도 일본 우익과 국민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쿄를 둘러싼 공원은 일본 특유의 정갈함과 맵시가 묻어났지만, 야스쿠니의 잔영 때문인지 음산함이 느껴졌다.

물론 일본인들이 모두 야스쿠니에서 주장하는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도 많은 사람이 평화를 사랑하고, 우익의 군국주의 회귀 움직임에 우려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2011년 동북 대지진과 쓰나미, 경기의 장기침체로 인한 위기의식에 편승해 우익이 기승을 부리면서 국가주의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과연 일본에 희망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끝내 가시지 않았다. 동시에 그동안의 세계여행에서 희미하게 형성됐던 코스모폴리탄적 인식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혼란스런 질문도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