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경원ㆍ강승연ㆍ이세진 기자]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한 개인의 ‘연(緣)’에서 파생된 부패로 한국 사회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그가 남긴 메모지 한 장에서 촉발된 ‘성완종 게이트’ 는 유력 정ㆍ관계, 금융계 인사들과의 비리 스캔들을 야기시키며 돈으로 얽힌 권력층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부정부패 척결을 앞장서 외쳤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마저 금품 수수 혐의로 낙마해 검찰소환을 앞둔 신세로 전락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은 한국 사회에서 사적인 인연이 공적 영역에서도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간부문에서는 ‘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지만, 정작 권력 핵심부에서 한국 사회의 고질병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성 전 회장은 개인적 연을 공적으로 활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2007년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에서는 ‘연 맺는 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 이해관계를 먼저 따지는 것은 바보짓”이라며 “사심없이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그 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맺은 인연의 대표적인 형태가 성 전 회장이 지난 2000년 주도적으로 만든 ‘충청포럼’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등 충청권 지역 정ㆍ관계 유력 인사와 언론인을 두루 포섭하며 창립 15년 만에 전국 10개 지부, 회원 3500명을 거느린 거대 조직이 된 이 사조직은 이번 파문의 핵심 ‘고리’가 되고 있다.
비단 충청포럼 뿐 아니라 여러 지연ㆍ혈연ㆍ학연 단체들이 한국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 인연의 끈을 매놓고 있다.
▶정치 게이트 파문의 진원지 ‘향우회’=‘성완종 리스트’ 사건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연고주의 문화의 병폐를 여실히 드러냈다. 고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만들어진 향우회가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됐다는 지적이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2000년 주도적으로 만든 ‘충청포럼’은 충청권 지역 정ㆍ관계 유력 인사와 언론인을 두루 포섭하며 창립 15년 만에 전국 10개 지부, 회원 3500명을 거느린 거대 조직이 됐다. 충청포럼 회원으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최수현 전 금융감독원장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거물들이 포진해있다.
충청포럼은 운영위원과 유력 인사들을 중심으로 1년에 한두차례 정기적ㆍ비정기적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학연이 없었던 성 전 회장은 지연을 기반으로 한 충청포럼을 활용해 인맥을 쌓아왔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이었던 그가 정치권에 입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검찰이 금품로비 의혹 수사에서 성 전회장과 정치인을 연결시켜주는 중요 인물로 충청포럼 인사들을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성 전회장의 핵심측근이자, 전 경남기업 재무담당 부사장인 한모씨가 “2012년 대선 즈음 박근혜 후보 대선캠프에 2억원을 전달했다”는 당사자인 김모 부대변인도 충청포럼 회원이다.
언론인 출신인 김 씨는 성 회장이 이끈 충청포럼 회원으로 성 회장과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해 왔다. 한 부사장은 검찰 진술에서 “경남기업 회장실을 방문한 김 씨에게 돈을 줬지만 이 돈이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전달되는 것인지는 몰랐다”고 얘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소환조사에서 김 씨가 성 회장이 홍 의원에게 건넸다고 주장한 2억 원의 ‘전달자’로 확인되면 2012년 대선자금 수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성 전 회장은 이완구 국무총리와는 충청향우회의 이너서클 격인 ‘백소회’에서 연을 두텁게 맺은 것으로 전해졌다. ‘백제의 미소’라는 뜻의 백소회는 1992년 임덕규 월간 디플로머시 회장이 창립한 모임으로 1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매달 특급 호텔에서 모임을 가지며 친목을 다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 이전에도 역대 게이트 사건을 살펴보면 향우회가 부정부패의 핵심 ‘고리’로 작용한 사례가 많았다. 2012년 이명박(MB) 정부 말기 정국을 뒤흔든 파이시티 인허가 로비 사건에는 포항 출신 5급 이상 중앙 공무원 모임인 ‘영포회’가 주요 역할을 했다.
이정배 전 파이시티 대표는 개발사업 인허가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자 영포회 소속 브로커를 통해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소개받았다.
최 전 위원장과 박 전 차관은 이 전 대표로부터 인허가를 도와달라는 청탁과 함께 각각 8억원과 1억6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전 대표는 또 이들을 통해 서울시를 상대로 로비를 하거나 압력을 넣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 권력형 비리 사건인 ‘이용호 게이트’의 경우 광주 인맥이 문제가 됐다. 이용호 전 G&G그룹 회장이 재경광주상고 동문회인 ‘산우회’를 통해 만난 호남 출신 국가정보원, 금감원, 검찰, 경찰 등 정ㆍ관계 인사들에게 로비를 한 의혹이 제기됐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 씨는 이 전 회장으로부터 보물선 발굴사업 관련 청탁과 함께 47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으며 당시 신승남 검찰총장이 낙마하기도 했다.
▶호남향우회, 고대교우회, 해병전우회…=학연ㆍ혈연ㆍ지연으로 우리사회에 뿌리내린 단체들은 많다. 지연의 대명사로 통하는호남향우회는 1960년대 중후반부터 가속화된 경제발전 바람을 타고 도시로 흘러들어 온 호남 출신 사람들이 결속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을이나 동 단위로 모여 서로 도시 생활의 어려움을 나누고, 고향 농산물을 공동구매하는 등 활동을 한 것이 초기적인 형태다.
전국호남향우회총연합회 중앙회 측에 따르면 현재 호남지역 외 거주하는 향우 규모는 9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2000년 무렵부터는 향우회를 전국 단위로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난 2006년 정식으로 발족했던 전국호남향우회총연합회는 이후 총재의 정치적 거취를 둘러싸고 내홍이 일어 현재는 두개 단체로 쪼개진 상태다.
한편에선 향우회가 지역감정을 부채질한다는 우려가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총선이나 대선 등 선거철에는 호남향우외 뿐 아니라 영남, 충청 등 향우회가 앞다투어 개최하는 행사에 지역 출신 정치인이 참여해 지지를 호소하기도 한다. 4.29 재보선 당시 호남향우회 임원단이 광주 서구에 출마한 천정배 후보 유세장을 응원 방문하기도 했다.
고려대 졸업생 모임인 고대교우회는 우리사회 학연의 대명사로 꼽힌다.
고대 교우회는 매년 ‘자랑스러운 고대인’을 선정하는가 하면, 지난해부터 신년행사에서 인문사회, 자연계, 보건의약 3개 부문에서 ‘교우회 학술상’을 시상하고 있다.
교우회 장학회도 다른 총동문회 운용 장학금에 비해 큰 규모다. 끈끈한 선후배 관계는 타대학 출신들에겐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학벌로 형성된 연줄을 사회로까지 확장시켜 공정한 경쟁을 흐린다는 지적도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 때에는 KBㆍ우리ㆍ하나금융지주 회장 등 핵심 금융권 인사들이 고대 출신 일색으로 채워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해병대 전우회는 현재 중앙회 산하 17개 광역시도 연합회, 해외 4개 연합회 등 100만 회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친목 단합행사와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주로 한다. 어려운 군생활을 함께한 전우애를 사회에 까지 확장시켜 사회 위기때마다 솔선수범을 실천하며 찬사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폐쇄적이고 호전적인 해병대 특유의 문화가 사회활동까지 연장돼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에 대해 우려의 시각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1980년대 말 해병대 전우회가 우익단체로서 막 형성될 무렵에는 경찰의 고유업무였던 치안업무에까지 관여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혈연으로 형성된 종친회도 있다. 대부분 규모가 작고 종중의 제사나 재산 관리를 공동으로 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조선시대 말 ‘안동김씨’ ‘풍양조씨’ 하던 소위 ‘세도가’들은 아직도 종친회 활동을 유효하게 조직하고 있다.
▶‘사적 인연→부패구조 악용’ 사회 시스템 개선해야=전문가들은 사적 인연을 부패구조로 악용하는 사회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입은 모은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군사정권 등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국민의 지지에 기반한 권력이 출범하지 못했고, 친분이나 인맥으로 인사를 하면서 ‘내 사람’, ‘내 라인’이라는 개념이 강해졌다”며 “사회 전반에 걸쳐 감시 기능을 강화하고, 옴부즈맨 제도 활용 등을 통해 일상적인 문제의 감시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정부패, 정실주의, ‘관피아’ 논란까지 불거지며 사람 관계에 따른 신뢰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어느 때보다 강한 것이 사실”이라며 “관계에 대한 신뢰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사회적 프로세스에서 투명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한편, 매년 아시아 국가들의 부패지수를 측정해 공개하는 홍콩 정치경제리스크컨설턴시(PERC)는 최근 ‘2015 아시아ㆍ태평양 국가 부패인식’ 보고서에서 한국을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 최악의 부패 인식을 갖고 있는 ‘특별한 국가’”라고 평가했다.
다양한 인연의 끈이 부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문제삼은 것으로 풀이된다.
gi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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