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조용직 기자] 요즘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괴랄한 유행어가 하나 돌고 있다. 들어는 봤을 것이다. ‘하룻 그레고리안 으아’.
얼마나 유행이냐면 좌우가 따로 없다. 반사회적 성향의 극우 커뮤니티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좌익진보 성향의 오늘의 유머(오유)를 비롯해 디시인사이드, 루리웹 등 내로라 하는 사이트에서도 이 유행어를 쓴다. 구글로 이를 검색하면 몇 페이지를 넘어갈 만큼 관련 게시물이 줄줄이 쏟아진다.
혹자는 이를 ‘아몰랑’ 이후 최대 유행어로 꼽기도 한다. 그만큼 여러 곳에서 회자된다.
이 유행어는 뜬금없게도 유명 종합격투기 파이터 서두원(34)이 6년 전인 2009년 한 국제대회에서 프로모션용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유래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상대선수를 향해 “하룻 그레고리안(상대선수 이름) 으아~(호흡 가다듬는 소리), 당신이 죽든 내가 죽든 둘중 하나는 꼭 죽어서 (링을) 내려오도록 합시다”라고 결전의지를 피력했다.
이 경기에서 서두원은 패했다. 간장에 제대로 박힌 바디블로에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다운됐다. 다시 일어섰지만 무릎공격 연발을 맞고 또 다시 캔버스에 쓰러졌다. 1라운드가 끝나기 전 심판의 TKO 선언이 내려졌다.
6년이나 지난 이 경기가 올해 다시 안티 팬들 사이에 회자되며 서두원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튜브에는 당시 경기 동영상에 효과음, 자막 등을 합성해 야인시대 버전, 슈퍼마리오 버전, 스트리트 파이터 버전 등 코믹한 패러디물이 쏟아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하룻 그레고리안 으아~’가 게시물 문구와 댓글을 장식한다. 격투기를 잘 모르는 일반 커뮤니티 이용자들도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든다.
이런 현상에 대해 매우 유감이다. 나도 사실 서두원의 패러디물을 보며 껄껄 웃었지만 양심이 적이 찔린다. 선수를 기량 우선으로 평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때, 서두원을 이런 유행어와 패러디로 조롱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판단이다. 또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두원은 네오파이트 라이트급 챔피언 출신이며, 최근에도 로드FC 페더급(66kg) 타이틀에 도전했을 만큼 국내 정상권의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다. 예능 프로그램 외도가 잦았다고는 해도 기량이 유지되고 있는 만큼 비판할 거리는 못 된다. 세계 최대 무대라는 UFC의 랭커들과 견주기는 어려울지언정 기량은 인정해야 옳다.
그리고 안티 팬들의 놀림에 빌미가 된 2009년의 그 대회는 종합격투기가 아닌 입식격투기 대회였다. 더욱이 세계 메이저로 통하는 이츠쇼타임이었고, 상대는 한창 전승가도를 달리던 아르메니아 태생 벨기에 파이터 하룻 그레고리안이었다. 그는 당시도 무명이고, 현재도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선수지만 서두원 전 전까지 12연승중이었고, 현재 56전 47승(9패)를 달리고 있는 선수다.
동구권 출신의 무명 킥복서를 상대하는 것만큼 리스크가 큰 경기가 없다는 사실은 팬들은 알지 모르겠다. K-1 현역 선수들이 아르바이트처럼 참가한 마이너대회에서 이름도 못 들어본 동구권 파이터에게 처참하게 깨지는 일은 종종 있었다. 뜬금 없는 괴력 파이터들이 동토의 땅에는 가끔씩 있다.
확신한다. 하룻 그레고리안을 이길 동체급(70kg) 선수는 국내에선 종합격투기뿐 아니라 입식격투기 전문선수를 통틀어 봐도 현재 없다. 이성현 정도가 해 볼 만 할까. 그리고 과거에도 없었다. 국제 메이저 입식격투기 무대는 이처럼 만만하지 않다.
서두원은 엄연히 종합격투기 전문 선수임에도 입식격투기 무대에 도전했고, 상대 또한 막강했다. 이런 매치메이킹을 굳이 피하지 않고 응했다. 그리고 장렬하게 링 위에서 산화했다.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이것이 과연 조롱거리인가. 킬킬대며 그 선수의 인격을 깎아내려도 괜찮은가.
서두원의 사정이 좋을 때는 짓궂게 놀려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서두원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맞고 있다. 전속 대회사 로드FC에서 퇴출될 위기이며, 자신의 이름으로 운영하던 서두원짐도 로드FC에 반납했다. 제자이자 여자친구인 송가연 역시 소속사 분쟁에 얽혀 진퇴양난이다. 며칠전 투병중이던 부친마저 작고했다.
서두원의 경기장 밖 사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말도 나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지금 그를 놀리는 것은 극도로 비겁하고 야만적이다. 놀려도 좋을 때 놀려야 서두원도 웃으며 받아칠 것이다.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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