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시절에 미국인 가정에 초대되어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필자의 식음(食飮) 소리에 그 댁 딸아이가 재미있다는 듯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인들은 식사 중에 대화는 즐기면서도 식음 소리 자체는 극도로 자제한다는 ‘이론’은 알았지만, 막상 ‘실천’은 못했던 모양이다. 필자는 식사 중에 이야기는 되도록 삼가되, 먹성 좋게 식사하느라 내는 자연스러운 소리에는 무척 너그러운 집안에서 자랐던 터였다.
독일계 사회학자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명저 ‘문명화 과정’에 의하면, 근대 서양인들이 식탁에서 잠자리까지 일상생활에서 중시하는 예의범절(manner)의 대부분이 중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그들이 야만적이고 ‘문명화되지 않았다(uncivilized)’고 흉보고 깔보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바로 그들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 같이 ‘문명화된’ 예의범절이 발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왕에서 귀족으로 귀족에서 신흥 자본가로 그리고 일반평민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사다리에서 상급자가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하급자들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차별화와 동화(同化)를 전략적으로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개된 서구의 문명화 과정은 그 후 근대화의 명분 위에 제국주의 바람을 타고 비서구권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예의범절 가운데에는 이처럼 소수 힘 있는 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필요성 때문에 자리 잡은 경우도 적지 않다. 런던정경대(LSE) 부설 ‘영국정치경제학도서관’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그 큰 건물의 한 층 정도는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코를 풀어 대는 학생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 금기사항에 가까운 식탁에서 코푸는 행위에 대해서도 영국인들은 관대하기 이를 데 없다. 심지어 텔레비전 생방송 중에 출연자가 자기 윗주머니에 꽂힌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본래 자리에 다시 꾸겨 넣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 때 한국여성 대부분의 자주빛 입술연지처럼, 요즈음 한국남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는 ‘윗주머니-손수건(pocket-handkerchief)’이 연중 구중중한 날씨로 인해 비염이 심한 영국인들에게는 기능적 이유에서 유래한 모양이다.
그런데 또 다른 생리현상인 기침에 대해서는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서양인들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헛기침한 사람을 깜짝 놀라 힐긋 돌아보는 그들이다. 세미나 장소에서 목청을 트기 위해 헛기침이라도 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실례를 범했다”고 공개 사과하는 그들에게서 역시 위생이라는 기능적 필요가 이유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길 좀 비켜달라는 인기척을 비롯해 다양하게 기침소리를 활용해 온 우리로서는 적응이 쉽지 않은 서양식 매너다. 허기사 행세께나 하는 사람일수록 헛기침 소리가 큰 것을 보면 엘리아스의 권력론을 적용할 여지 또한 없지는 않다.
지난 두 달 우리에게 엄청난 인적, 물적, 그리고 사회심리적 손실을 끼친 ‘증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가 일단 종료됐다. 이 역병 사태를 겪으면서 앞으로 개선해야할 사항들이 여럿 드러났다. 무능하기 그지없던 질병관리본부를 포함한 정부의 위기관리행정, 규모와는 상관없이 응급실에서 입원실에 이르기까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던 병원행정을 획기적으로 개혁해야겠다. 그러나 우리 일반인들 또한 일상생활에서 바꿔야 할 사항들이 적지 않다. 코풀고 기침하고 손 씻는 방식 등 지극히 소소한 일상의 생활양식에서 훈훈한 미덕의 풍습인 병문안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관행을 되돌아보고 적극 개선해야겠다. 이것은 서양식 문명화 과정에 동화되는 것도, 권력자의 음모에 말려드는 것도 아닌, 우리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nyang@heraldcorp.com
![앤트로픽 IPO는 시작일 뿐…AI 모델 ‘골라주는 시장’ 커진다 [서학개미 주식회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3/rcv.YNA.20260813.PRU20260813276001009_T1.jpg?type=h&h=240)
![“교과서 미래엔 AI가 있다”…‘AI 공장’된 미래엔 세종공장 [그 회사 어때?]](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2/news-p.v1.20260821.9213ff47283443e4aeec745e2b971c31_T1.jpg?type=h&h=240)
![일본서 사라진 인플레 ‘명목 앵커’…물가·엔화에 중요한 이유 [츠토무 와타나베]](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1/news-p.v1.20260816.209013b3297d4c92ab32710d529f3877_T1.jp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