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한석희 기자]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1개월 연속 0%대를 기록했다. 산업생산은 54개월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경상수지도 43개월째 흑자를 기록했다.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지난해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10년 만에 가장 높게 나타났다.

최근 나온 지표들이다. 수치로만 보면 이런 호경기도 없다. 기계는 쉼없이 돌아가고 있고, 나라 곳간엔 달러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가계는 소득도 많은데다 물가까지 낮다보니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는 미덕도 생겼다. “저축이 힘이다”는 70~80년대 표어가 현실이 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곳곳에서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고 난리다. 심지어 “지금 경기상황이 외환위기 당시와 같으면 같았지 좋지는 않다”는 진단을 내놓는 경제 전문가들도 많다. 경제 상황만 놓고 보면 하루 아침에 나라가 부도나고,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신문지 한 장에 웅크리고 거리를 배회하던 지난 1990년대말과 2015년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표면적인 수치만 놓고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이게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지표는 잠시 제쳐두고 안을 들여다 보면 개운치 않은 측면이 많다. 심지어 ‘암울한 미래’를 탄식하게 하는 수치들도 보인다.

디플레이션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소비자물가만 봐도 이상한 구석이 한 두개가 아니다. 10월 물가상승률은 0.9%를 기록했다. 작년 11월 1.0% 이후 1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1%에 근접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11개월째 0%대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에 장보기가 무섭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생활물가는 0.1%로 낮은 상승률을 보였지만, 채소, 과일, 어류 등 신선식품 물가는 3.7%나 올랐다. 양파 값은 91.0%나 뛰어 올랐고, 파(43.2%), 마늘(33.9%)도 큰 폭으로 값이 올랐다. 장을 보는 소비자들에게 ‘낮은 물가상승률’은 남의 얘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생산도 별반 다르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9월 산업생산은 한달 새 2.4%나 뛰었다. 하지만 이는 추석연휴와 개별소비세 인하, 코리아 그랜드 세일 등 정부의 내수 활성화 정책의 ‘반짝 효과’에 지나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정부의 밀어부치기식 정책에 내수만 반짝 살아났다는 착시 효과라는 얘기다. 실제 9월 수출액은 435억1000만달러로 1년 새 8.3%나 급급했다. 한국은행의 10월 수출BSI도 80으로 전달보다 1포인트 내려갔다.

나라 곳간에 쌓이고 있는 달러도 달갑지만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06억1000만달러에 달한다. 2012년 3월부터 43개월째 계속되면서 최장 흑자기록을 새로 쓰고 있지만, 수출과 수입이 함께 감소하는 가운데 수입이 더 많이 줄어드는 불황형 흑자다. 돈을 벌어오지도 못하다보니 쓰지도 못해 곳간에 돈이 쌓이는 역설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곳간에 쌓이는 달러는 원화가치를 올려 기업의 수출 경쟁력에 타격만 준다.

10년만에 가장 높게 나타난 저축률은 ‘이상한 지표들의 향연(?)’의 정점에 있다. 가계에 돈이 남아 돌아서 저축을 하는게 아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소비는 줄이는 대신 돈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2012년 이후 3년 연속 소비증가율은 가계 소득 증가율을 밑돌고 있다. 게다가 2010년 77.3%로 정점을 찍었던 가계의 평균소비성향 역시 지난해엔 72.9%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100만원의 돈을 쓸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72만9000원만 쓰고 나머지 돈은 쟁겨 놓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저축→소비부진→경기침체→투자위축→가계소득 저하’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낳고 있다. 한국경제가 케인즈가 경고한 ‘절약의 역설’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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