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이란 단어는 팔방미인이다. IT와 혁신이 만나면 창조경제가 되고, 정치와 혁신이 만나면 지지율이 급상승한다.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빠른 경제성장과, 역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정치 민주화를 단숨에 일궈낸 지난 60여년의 역동적인 경험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 되고, 정치적으로는 아시아에서 1, 2등을 다투는 민주주의 국가가 됐지만, 여전히 ‘혁신’을 갈망하는 목소리를 높게 만든다.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로 대표되는 답답한 현실을 단번에 해결해 줄 것 같은 마약같은 단어다.
그래서 ‘혁신’에 걸림돌로 지목받는 제도나 법, 기업, 또는 집단은 지탄의 대상이 된다. 우버와 에이앤비 상륙을 가로막는 기존 교통 법률과 공무원 집단, 직능단체, 그리고 이런 기존 시스템을 지지하는 전문가가 ‘꼰대’라는 질타를 받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때로는 혁신을 앞세운 벤처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저작권 침해를 대기업의 횡포로 둔갑시키려는 놀라운 일도 일어난다. 모두들 ‘혁신’을 갈망하는 대중의 여론에 기댄 시도다.
하지만 ‘혁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꼰대’ 같은 법이나 제도, 또는 집단이 생긴 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택시와 랜터카, 콜 시스탬이 수십년에 걸쳐 완성된 우리나라에서 자가용 영업을 골자로 하는 우버가 설 자리는 없는게 당연하고, 또 수백개의 호텔과 모텔, 심지어 팬션과 민박까지 있기에 무면허 탈세 업자의 난립을 양산할 에이앤비를 금지하는 것은 필연이다. 우리나라만의 특성을 가진 주파수에 맞지 않는, 그래서 타 기기에 간섭까지 줄 수 있는 ‘불량’ 전자기기를 판매 금지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혁신이란 단어가 불법, 또는 무법으로 치환되서는 안된다. 기존의 낡고 고루함을 뒤집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우리사회, 그리고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장려되고 또 끊임없이 시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뻔히 보이는 부작용까지 눈 감고 넘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 인터넷 공간은 ‘엑티브 엑스’ 문제로 시끄럽다. 상당수 금융기관, 정부 사이트가 글로벌 표준에서 벗어난 ‘엑티브 엑스’에 기반한, 결제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어 새로나온 외국계 소프트웨어 회사인 MS의 새 시스템을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없다고 불평의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 MS는 우리 정부와 기업들에게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을 써서, 빨리 시스템을 바꾸도록 종용하고 있다. 글로벌 표준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논리다. 상당수 언론, 여론도 여기에 동조할 뿐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의 ‘엑티브 엑스’ 시스템을 만들고 도입한 곳이 MS라는 사실에는 둔감하다. 자기들이 만든 제품에 대한 사후관리가 어렵다고, 은근슬쩍 그 책임을 고객에게 100% 전가시키고 있는 행위다. 우리는 세계 최고 IT 인프라를 기반으로 남들보다 한 10년 빨리 인터넷 뱅킹과 전자상거래를 도입했고, 이 과정에서 이 회사의 시스템을 수용한 죄가 있을 뿐이다. ‘혁신’이란 포장지에 속아 또 다시 MS의 횡포에 휘둘리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문제의 근본 원인과 책임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정부와 여론의 공격적인 태도 변화가 필요할 때다.
choij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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