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김추련이 8일 오전 숨진 채 발견됐다. 생활고에 외로움이 겹쳐진 노배우의 삶은 그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 길로 이끌었다. 화려한 청년기를 보낸 배우의 마지막에 빛은 사라지고 말았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고인은 1974년 영화 ‘빵간에 산다’로 데뷔하며 대중에 이름과 얼굴을 알린 7, 80년대 청춘스타다.
이 첫 영화로 제11회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한 김추련, 1977년‘겨울 여자’에 당대 최고스타인 장미희, 신성일과 함께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고 이후 5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영화의 번영을 함께 끌어온 영화인이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영화가 다소 침체기를 맞았을 당시에도 김추련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꽃순이를 아시나요’(1978), ‘밤의 찬가’(1979), ‘매일 죽는 남자’(1980) 등 수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았던 그는 곧 충무로에 활기를 불어넣은 주역이었다.
하지만 영화인이 아닌 생활인으로서의 김추련의 삶은 그리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카페 등 사업에 손댔으나 여의치 않았던 것. 이후 80년대 말부터 몇몇 에로영화를 통해서만 얼굴을 비쳤을 뿐 대중의 기억에서는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90년대를 이름 없이 보냈지만 김추련은 위기였던 순간 또 한 번 힘을 쏟았다.
2006년 ‘썬데이 서울’의 조연으로 다시 스크린에 얼굴을 비췄고 최근 개봉한 박갑종 감독의 영화 ‘은어’에서 주연을 맡아 전성기 못지않은 열정적인 연기를 펼치며 청춘스타의 면모를 과시했던 것. 특히 지난 9월 말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관객들과 영화 관계자들을 만났다. 하지만 ‘은어’는 김추련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김추련의 예술적 미감은 음악으로도 닿았다. 영화 못지 않게 음악에 대한 열망도 컸던 김추련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늘 가수의 꿈을 품었다. 대학시절 음악다방에서 DJ로 활동하기도 했던 김추련은 2003년 첫 앨범을 발표했고 2008년과 2009년, 올해 3월까지 네 장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마산의 동마산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0일 오전 7시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news@heraldm.com
shee@heraldcorp.com
![일본서 사라진 인플레 ‘명목 앵커’…물가·엔화에 중요한 이유 [츠토무 와타나베]](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1/news-p.v1.20260816.209013b3297d4c92ab32710d529f3877_T1.jpg?type=h&h=240)
![프롬프트의 신법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1/news-p.v1.20260901.203c531a96884d4da174595cad521d59_T1.png?type=h&h=240)
![자산가의 저력은 하락장서 나타난다…위기 속 기회 찾는 ‘힘’ [큰손 따라잡기]](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8/31/news-p.v1.20260831.a0fa168d036d4658b6cb03a0502c0de4_T1.jp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