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송하준 기자] 코스닥 상장사들이 자금 확보에 난항을 겪으면서 투자자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거나 수백억원 규모의 조달 계획을 잇따라 철회하고 있다. 자금 납입이 무산되거나 기존 전환사채(CB)의 상환 조건까지 변경하는 기업도 나타나면서 코스닥 성장기업들의 자금조달 부담이 한층 가중되는 모양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비용 부담에 투자 심리 위축까지 겹치면서 자금이 절실한 기업일수록 투자자 확보에 애를 먹는 악순환이 심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보로노이는 키움증권을 주관사로 800억원 규모의 5년 만기 무보증 사모 CB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조달 자금은 폐암 신약 후보물질 VRN11의 글로벌 임상 등 연구개발과 운영자금에 활용할 계획이다. 지난달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투자 의향을 타진했으며 이달 중 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헤럴드경제가 입수한 투자제안서에 따르면 이번 CB에는 회사 측의 매도청구권(콜옵션)을 부여하지 않는 방안이 담겼다. 반면 투자자는 발행 2년 뒤부터 3개월마다 보유 사채 전액에 대해 조기상환청구권(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다. 전환가액은 7개월마다 조정하되 최초 전환가액의 70%까지 낮출 수 있도록 했다. 표면금리는 0%, 만기보장수익률(YTM)은 연복리 2%, 조기상환수익률(YTP)은 2%로 제시됐다.
눈여겨볼 대목은 지난해 발행한 500억원 규모의 CB에는 포함됐던 콜옵션이 이번 발행안에서는 빠졌다는 점이다. 회사가 CB를 되사들여 향후 주식 전환 물량을 관리할 수 있는 선택지는 줄어드는 반면, 투자자는 주가 상승 시 주식 전환으로 차익을 실현하거나 조기상환을 요구할 수 있다. 여기에 전환가액 조정과 만기·조기상환수익률까지 제시돼 투자자는 주가 하락에도 대비할 수 있다. 회사가 자금조달을 위해 불리한 조건까지 감수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자금조달 계획이 무산되거나 기존 CB의 상환 조건을 변경한 기업도 있다. 코스닥 상장사 더코디는 지난달 6일 투자자들의 납입 불이행으로 총 330억원 규모의 CB 발행 결정을 철회했다. 이차전지 전해액 기업 엔켐은 지난 8월 약 2380억원의 미상환 잔액이 남아 있던 제14회차 CB의 조기상환청구권을 삭제하는 조건 변경안을 사채권자집회에서 가결했다. 대신 미국·유럽 등 해외 법인 지분을 담보로 제공하고 향후 3년간 총 750억원 규모의 CB를 매입·소각하기로 했다.
고금리 환경은 코스닥 중소형 기업의 자금조달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시장금리가 높아지면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수익률도 높아져 상대적으로 위험이 큰 기업은 자금 유치를 위해 더 유리한 발행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특히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하지 못한 성장기업은 은행 차입이나 회사채 발행에도 제약을 받아 CB와 유상증자 등을 통한 자금 확보가 중요해진다.
진성훈 코스닥협회 연구정책그룹장은 금리와 유가 상승에 증시 불안까지 겹치면서 연말을 앞둔 기관투자자들이 신규 투자에 소극적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기관투자자들은 연말 성과급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섣불리 투자에 나섰다가 손실이 발생하면 성과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자금조달 부담을 덜기 위해 은행 대출과 증권사를 통한 자금 지원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올해 하반기 발표한 ‘기업 자금조달 실태와 정책과제 조사’에 따르면 은행의 기업대출 규제를 완화해 대출을 늘려야 한다는 응답이 52.5%로 가장 많았다. 증권사의 발행어음·종합투자계좌(IMA)를 통한 기업 자금 지원 확대(23.5%), 정책금융기관의 저금리 대출 확대(13.7%)가 뒤를 이었다.
은행 대출뿐 아니라 증권사를 통한 기업금융과 정책금융을 활성화해 자금조달 경로를 넓혀야 한다는 취지다. 송승혁 대한상의 금융산업팀장은 “지수 등락과 별개로, 기업이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느냐가 갈수록 관건이 되고 있다”며 “생산적 금융 전환이 본격 추진되는 만큼 그 효과가 기업 현장의 자금조달로 이어지도록, 은행의 기업여신 여력을 키우고 발행시장 여건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금조달 여건 개선과 함께 기업의 공시 신뢰를 높이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금조달 계획에 대한 공시가 부정확하거나 변경 사항이 제때 전달되지 않으면 투자자의 신뢰가 떨어지고, 기업의 자금 유치도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홍지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공시위반에 대한 제재와 경고 기능은 일정 부분 작동하고 있지만 사전 예방과 내부통제 개선을 유도하는 기능은 제한적이어서 일부 기업에서는 동일한 유형의 공시위반이 반복되고 있다”며 “단순히 제재를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 내부의 공시관리 체계와 책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반복 위반 기업의 공시관리 역량과 내부통제를 개선할 수 있도록 관리·지원 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금융지원 확대와 공시관리 개선만으로 코스닥 중소형 기업들의 자금조달 문제가 해소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한 상장폐지 요건이 강화되면서 일부 중소형 기업의 자금조달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진성훈 코스닥협회 연구정책그룹장은 “결국 지금 돈이 필요한 기업들은 자금조달이 안 되고, 돈이 필요 없는 기업들만 자금조달이 되는 것”이라며 “시가총액이 받쳐주지 않으면 지금 상황에서는 증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상장폐지 우려가 커질수록 투자자들이 자금 회수 가능성을 따지면서 신규 투자에 소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진 그룹장은 “모험자본도 결국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상장폐지가 되면 회수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hajun82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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