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연연(戀戀)하다’. ‘집착해 미련을 가지다’라는 뜻이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은 특정한 지위나 직위에 미련을 갖지 않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돼 있다는 의미이겠다.

정치권에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이 유행어나 관용어라도 되듯 걸핏하면 튀어 나온다. 그만큼 진퇴와 거취가 문제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파문이 전방위로 덮친 청와대와 정부, 정치권의 황폐한 풍경이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에선 지도부 거취가 당내의 첨예한 논쟁 사안이다. 이정현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소속 의원 129명 중 드러난 것만 60여명 전후의 의원들이 이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도 “자리에 연연않겠다”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나온다. 이 대표는 지난 2일 최고위원-중진 연석 회의에서 “잠 오는 약을 먹어도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어렵고 겁난다”며 “내가 자리에 연연해 한다고 보느냐, 우선은 위기를 수습하고, 수습 후에도 이런 주문을 한다면 그때 판단하겠다”고 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도 지난달 26일 의원총회 직후 “나를 비롯한 지도부 누구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며 “언제라도 수습하면 미련없이 물러나겠다”고 했다.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자는 지명 후 첫 공식 기자간담회에서 이 말을 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등 야당과 여당일부로부터 자진 사퇴 요구에 부딪친 김 내정자는 지난 3일 금융감독원 연수원 회의실에서 발언을 마무리하며 “책임과 역사적 소명을 다할 것이며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울먹였다. 그러나 4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이후 야권에서는 김 내정자 등 개각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김 내정자는 5일 서울 서초구 한 호텔에서 열린 딸 결혼식에서 기자들을 만나 자진 사퇴 가능성에 대해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김 내정자와 한광옥 비서실장의 인선 전 정치권에서는 내각 총사퇴와 청와대 비서진 전면 교체 요구가 잇따랐다. 이에 황교안 국무총리와 이원종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달 26일 국회 예산결산특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최순실씨 국정농단 의혹 파문은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강 장관은 새누리당 19대 국회의원 시절이던 지난 2014년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에서 제기된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승마 국가대표 선발특혜 의혹에 대해 정씨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강 장관은 지난 4일 오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야당 의원들로부터 이에 대해 추궁을 받자 이에 대해 사과ㆍ해명하며 “주어진 시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하도록 하겠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의 표면적인 뜻은 “언제든 자리를 버릴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속뜻은 지금 자리를 지키는 것은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공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하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리고 그 단서에 대한 해석이 제각기 달라 “물러나라, 못 물러난다”고 싸운다. 어쩌면 “자리에 연연하지않겠다”는 말은 “지금 당장 스스로 물러날 의사는 결코 없다”는 뜻의 우회적인, 그러나 가장 강경한 의지의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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