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브랜드 ‘오브제’로 돌풍…부부 디자이너 강진영ㆍ윤한희 -한국인 최초 뉴욕 컬렉션 진출…SK와 합병했지만 1년 후 美로 떠나 -2015년 ‘퀸마마 마켓’으로 삶의 양식 제시…“생활밀착형 공간 선보일 것”
[헤럴드경제=박로명 기자] 198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한 강의실. 스물 한 살 청년 강진영은 같은 과 윤한희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한쪽으로 쓸어 넘긴 비대칭 단발머리는 그녀의 속눈썹 끝에서 찰랑거렸다. 옷에 풍성한 리본을 달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그윽했다. 푸른 달처럼 떠오른 그녀를 짝사랑했다.
윤한희도 그가 싫지만은 않았다. 강진영은 고리타분한 말레이시아어과에서 드물게 멋을 아는 남자였다. 마이클 잭슨을 흉내 낸 9부 바지와 발목까지 당겨 신은 원색 양말은 어디에서든 시선을 끌었다. 그렇게 과생활을 하면서 둘은 친구로서 친해지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강진영이 대뜸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고백했다. 대학교 2학년때였다. 그 꿈이 어찌나 맹랑하고 순수하던지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때부터였을까. 강진영이 궁금해졌다. 뚜렷한 목표의식은 그녀가 갖지 못한 것이기에 더 특별해보였다. 강진영을 알아가보니 관심없던 패션도 좋아졌다. 그렇게 관심을 공유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야망의 청년에게도 단점은 있는 법. 뼛속까지 숙맥인 탓에 두 사람은 3년을 내리 ‘친구’로만 지냈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진심을 된장처럼 삭힌 그였다.
두 사람이 맺어진 것은 졸업 후였다. 볼 명분이 없어진 강진영이 뒤늦게 고백한 것이다. 그는 윤한희에게 “함께 패션을 공부하자”고 했다. 고백인지, 포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윤한희는 속뜻을 알았다. 이 남자가 자신과 함께 꿈을 공유하고 싶다는 것을. 그렇게 둘은 연인이 돼 유학길에 올랐다. 내친 김에 결혼까지 하게 됐다. 윤한희는 두 팔을 포갠 채 30년도 더 지난 일을 회상했다.
▶90년대 ‘오브제’로 패션계 강타=최근 신사동 도산공원 ‘퀸마마(QUEENMAMA) 마켓’에서 강진영(56)ㆍ윤한희(56) 디자이너 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거대한 온실 같은 공간을 가르며 다가왔다. 곳곳에 놓인 커다란 잎사귀의 연둣빛 식물들은 서로 어깨를 맞댄 채 큰 창으로 쏟아지는 정오의 햇볕을 흠뻑 받고 있었다. 한 때 패션계를 뒤흔들던 그들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또 다른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윤한희와 강진영은 각각 라이프 스타일 매장 퀸마마마켓의 대표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강진영과 윤한희는 1990년대를 풍미한 대표 디자이너다. 서른하나이던 1994년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14평짜리 옷 가게 ‘오브제(Obzee)’를 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유학 시절 히피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플라워 패턴, 풍성한 리본 등 낭만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오브제는 압구정 ‘오렌지족’은 물론 젊은 여성들까지 매료시켰다. ‘오브제풍’, ‘공주풍’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1997년에 선보인 세컨드 브랜드 ‘오즈세컨’ 역시 돌풍을 일으키며 백화점 여성복 코너 매출 1위를 꿰찼다.
강 씨 부부는 2001년 고가 브랜드 ‘와이앤케이(Y&Kei)’를 들고 한국인 최초로 뉴욕 컬렉션에 진출했다. 2003년 미국 패션 단체 ‘패션그룹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미국 신인상’을 받았다. 바니스, 버그도프굿맨 등 고급 백화점에서 입점 제의가 쏟아졌다. 윤 씨가 2004년 뉴욕에 선보인 ‘하니와이(Hanii Y)’도 기네스 팰트로, 니콜 리치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즐겨 입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더 높은 곳에 오르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됐다.
“미국 로컬 시장은 생각보다 단단했어요.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필립 림 등과 경쟁하며 자생력을 갖춰야 했습니다. 조바심이 났어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영, 마케팅 등을 도맡아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외부 경영진 영입도 고려했지만 결국 우연한 기회로 SK네트웍스와 인연이 닿았어요.” 윤한희가 말했다.
▶자식 같은 오브제와의 이별=2008년 SK네트웍스와 합병한 주식회사 ‘오브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날개를 달 것만 같았다. 그러나 1년 만인 2009년 강 씨 부부는 돌연 SK네트웍스와 갈라서며 패션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들은 뉴욕 시장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지길 원했지만, SK네트웍스는 더 큰 중국 시장에 뜻이 있었다.
“모회사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아요. 오브제는 저희에게 자식 같거든요. 단 한번도 오브제와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마음의 준비도 돼 있지 않았죠. SK네트웍스와 합병한 것도 자식을 더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였어요. 지금도 가끔 오브제를 볼 때면 제가 낳은 자식을 부잣집에 입양 보낸 것 같아요. 그저 그 아이가 잘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손을 만지작거리며 또박또박 말하던 윤한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묵은 슬픔이 그녀의 얼굴에 잠시 드리웠다.
그렇게 둘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강진영은 코넬대 대학원 어패럴디자인과 박사과정에 몰두했다. 그래야만 밀려드는 상념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한희는 스페인, 스코틀랜드 등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어떤 요구도, 구속도 없는 방랑 생활을 하니 패션 그 너머의 것이 보였다. 길모퉁이를 돌면 베란다에 머리를 삐죽 내민 꽃이 보였고, 고소한 피자 도우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진짜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패션, 그 너머의 진정한 삶=그로부터 6년 후인 2015년. 부부는 20여년을 돌고돌아 오브제를 잉태했던 신사동으로 돌아왔다. 의식주를 한 공간 안에 담은 라이프 스타일 매장 퀸마마마켓을 선보였다. 4년 사이 퀸마마마켓은 ‘산다는 것’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상징적인 장소로 거듭났다. 나무로 만든 화병, 작은 티스푼, 빳빳한 책, 고소한 커피 등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작고 사소한 것들이 모여 옹골찬 공간을 만들었다. 대기업들이 앞 다퉈 리빙 사업에 뛰어들기 전부터 한국인의 생활양식을 고민하고 제시했다.
“이 공간을 구성할 때 검소하고 소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았죠. 다양한 식물을 채워놓은 것도 우리의 삶에서 자연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방향성을 찾아가고 있지만 한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어요.” 윤한희가 말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두 번째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도 밝혔다. “퀸마마마켓을 도산공원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두 번째 프로젝트도 효창공원에서 시작할 것 같아요. 효창공원 같이 아름다운 곳을 그대로 두는 건 직무유기 아닌가요?(웃음) 약국이든 슈퍼마켓이든, 서점이든, 인근 주민들이 꼭 필요로 하는 시설만 모아 생활밀착형 공간을 만들 겁니다.
강진영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퀸마마마켓 오픈 초창기 브랜드 ‘진케이(Gene Kei)’를 선보였으나, 현재는 패션을 잠시 내려놓은 상태다. “제 자신에게 끝없이 던진 유일한 질문이 있어요. ‘왜 너는 디자이너인데 패션을 안해?’ 최근에야 답을 찾았어요. 뮤즈가 없었기 때문에 하고 싶었던 패션도 없었어요. 오브제 시절, 제 아내가 뮤즈였지만 미국으로 떠난 이후 상실감이 컸던 것 같아요. 이후에도 패션을 학문으로만 접하는 태도도 남아 있다 보니 계속 고민했어요. 그런데 최근에서야 아내를 보고 만들고 싶은 옷이 떠올랐어요. 어쩌면 패션을 다시 하게 될 것 같아요. 제 영원한 친구이자, 아내이자, 경쟁자이자, 뮤즈인 윤한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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