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잃어버린 에르메스 다이어리였다. 저자인 벤케문은 남편이 부적처럼 끼고 다니던 다이어리를 잃어버리자 새로 사려 하지만 더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얘길 듣고 이베이 중고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가장 비슷한 제품을 찾아내는데, 배송된 다이어리의 속주머니에 작은 주소록 수첩이 끼워져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벤케문은 별 생각없이 수첩을 넘기다 숨이 멎고 만다. ‘콕토:몽팡시에가 36번지’, ‘샤갈:,도핀 광장 22번지’. 이어 라캉, 아라공, 자코메티, 브루통, 발뤼스, 브라크 …. 스무 장짜리 수첩 안에는 전설적인 예술가들의 이름이 망라돼 있었다. 뒷장에는 1952년의 달력도. 이 천재들과 어울린 수첩의 주인은 대체 누구일까?
탐사 보도 전문가인 벤케문은 수첩의 이름에 홀려 유령을 찾아 나선다. 다이어리를 보낸 프랑스 중남부의 카지야크 골동품상에서 시작된 탐색의 여정은 거미줄처럼 이어져 이내 한 사람을 특정하게 된다. 수첩의 주인은 바로 저 유명한 피카소의 ‘우는 여인’의 모델이자 연인인 도라 마르.
벤케문은 수첩에 적힌 이름들과 관련된 자료, 서적들을 뒤지고 생존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피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장식한 뮤즈로만 알려진 도라 마르라는 여성 예술가의 삶을 새롭게 조명해낸다.
도라 마르의 본명은 앙리에트 테오도라 마르코비치. 1907년 파리에서 태어나 크로아티아 출신의 건축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아르헨티나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파리로 돌아와 사진 작가로 활동하면서 도라 마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20대 초반에 이미 패션과 광고 사진으로 이름을 알린 도라는 20대 중후반에는 빈곤과 실업, 기형 등으로 고통받는 주변부 인물들을 담은 르포 사진으로, 이후엔 전위적이고 독창적인 초현실주의적인 사진으로 큰 명성을 얻는다. 피카소와의 만남은 1935년 카페 되 마고에서다. 이년 뒤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업을 육 주 동안 단독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면서 피카소의 공식 연인이 된다. 그러나 그녀를 모델로 한 피카소의 ‘우는 여인’의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도라는 ‘우는 여인’에 묻히고 만다.
그 자신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리며 파리의 예술가, 컬렉터, 비평가들과 연결돼 있었지만 피카소와 결별하면서 급속히 예술계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그의 수첩에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이 등장한 이유다. 도라는 라캉으로부터 주기적으로 정신분석을 받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피카소의 권유에 따라 회화로 전향했지만 이렇다할 평가를 받지 못했고 칩거한 채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렇게 홀로 긴 세월을 견딘 도라는 1997년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도라는 ‘피카소의 연인’ ‘우는 여인’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로 평가받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 그녀의 작품은 다시 주목을 받아 2019년 테이트 모던과 퐁피두센터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게 된다.
저자는 도라의 예술과 어두운 면을 세심하게 살피며 현대 예술의 격동기 한복판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한 여성 예술가의 초상화를 새롭게 그려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corp.com
에르메스 수첩의 비밀/브리지트 벤케문 지음,윤진 옮김/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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