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 그림에 영감 받은 17명 작가
단편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 펴내
소설속 작품 중 3점 현재 서울서 전시중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꼽히는 에드워드 호퍼(1882-1967)는 비단 후배 작가들과 관객들의 마음만 훔친 것이 아니었다. 소설가와 시인 중에도 그의 팬이 많다. 지난 2016년엔 호퍼의 그림을 흠모하던 17명의 내로라 하는 작가들이 각각 작품 1개씩을 선정한 뒤, 이에 영감을 받은 단편소설을 썼다. 이를 모아 출간한 책이 책 ‘빛 혹은 그림자’(문학동네)다.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로런스 블록은 서문에 “호퍼는 캔버스 위에 펼쳐진 시간 속의 한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거기엔 분명히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지만,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호퍼의 그림 앞에서 관객은 한참을 응시하게 마련이다. 로런스 블록의 말 처럼, 그 안에 분명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한 몫을 한다. 책에서 선정한 17점 중 현재 3점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에 나왔다. 헤럴드경제가 그 그림과 함께 ‘빛혹은 그림자’에 언급된 소설을 짧게나마 소개한다.
푸른 저녁 X 로버트 올렌 버틀러
저녁이 막 내리기 시작한 시간, 식당에는 동양풍의 렌턴에 불을 밝히고 손님들이 앉았다.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분장을 했지만 그 피곤함이 보이는 담배를 문 피에로와 그 맞은편에 앉은 2명의 남자, 그리고 그 테이블을 약간 떨어져서 내려다보는 짙은 화장의 여자. 1919년작 ‘푸른저녁’이다.
호퍼는 이 작품을 파리 유학시절 이후 미국에 돌아와서 완성했다. 본인이 느꼈던 파리의 단상인 셈이다. 1993년 ‘이상한 산의 향기’(A Good Scent from the Strange Mountain)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로버트 올렌 버틀러는 광대와 여자, 그리고 화자(화가 본인)와 옆자리에 앉은 남자(르클레르 대령)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아 환타지 스릴러를 펼진다. 자신만의 뮤즈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르클레르 대령과 눈이 맞으리란 걸 알면서도 결국 그를 확인하고, 처참한 감정을 광대에 대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어릴적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이를 위한 광대는 결코 즐거움의 대명사가 아니다. 잊는 편이 나았던 과거가 모른척 하는 편이 나았던 현재와 겹쳐지며 기어코 수면위로 떠오른다.
밤의 창문 X 조너선 샌틀로퍼
1928년작 ‘밤의 창문’은 도시의 밤의 한 장면을 닺았다. 길게 내린 창으로 방 안쪽이 살짝 보인다. 핑크색 슬립을 입은 여자는 피곤한 하루를 정리하는 중인듯 하다. 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줄도 모른채. 현대 미국도시를 관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도시의 외로움과 고립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호퍼는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도시의 밤을 자주 그렸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화가인 조너선 샌틀로퍼는 핑크 슬립을 입은 여자와 그를 바라보는 시선(남자)을 이야기의 주요 화자로 삼는다. 관음증 환자 수준인 남자는 맞은편 창문이 보이는 건물에 거처를 얻고, 희생양이 될 여자를 기다린다. 덫을 데이트로 가장하고, 병적 집착을 연애로 치환하는 이 관계는 희생양인줄 알았던 여자가 사실은 주도적으로 기획한 판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범죄 스릴러 정도로 분류될 이야기는 짧지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햇빛 속의 여인 X 저스틴 스콧
누드의 여성이 방 안에 서있다. 양 다리는 살짝 벌린채 바닥을 단단하게 디디고, 손에 든 담배는 반쯤 탔다. 검정 펌프스 한켤레, 나무 침대, 벽엔 그림이 두 점 걸렸다. 여자는 당당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포즈다. 방안으로 길게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가 그렇듯 아내인 조세핀 니비슨 호퍼다. 실제 이 그림이 그려진 1961년 조세핀은 78세였으나, 호퍼는 디테일에 충실하기보다 자신의 심리에 솔직했다.
폴 개리슨이라는 필명으로도 유명한 저스틴 스콧은 햇볕이 들이치는 이 시간을 아침으로 상정했다. 여자가 담배를 태우면서 고민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이 삶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끝낼 것인가. 이미 준비는 끝났다. 어제 밤을 같이 보낸 이름 모르는 남자에게서 권총도 구했고, 차도 팔고, 주변 정리도 끝났다. 살아야하는 이유를 계속 되짚어 보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담배만 다 피우고 결정할 것이라는 여자의 말에선 미련이 읽힌다. 왜, 이런 상황까지 와야했는지 그리고 그 결론은 어떻게 날 것인지가 조마조마하게 펼쳐진다.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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