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이 먹혀들지 않고 있다. 하락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통화승수가 그 반증이다.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도 시장에서 신용창조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경제의 통화승수는 2008년 서브 프라임 금융위기 발발 이전 27배로 치솟았던 것이 지금은 19배까지 하락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그만큼 시중에 돈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이미 풀린 돈이 많이 있기 때문에 돈을 더 풀어도 효과가 나지 않는다. 통화정책무용론까지 들고 나설 정도는 아니다. 미국, 유럽, 일본처럼 제로금리인 나라들의 통화승수는 10배에도 미달하고 있고, 양적 완화를 통해서 돈을 살포했던 미국은 3배까지 하락했었을 정도이니 우리나라는 사정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화 정책의 전달 경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도 실물 경제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경기가 회복 국면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재침체에 빠질 가능성은 상존한다. 특히 유럽 위기의 재발, 신흥국 도미노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 복병도 언제든지 현실화 할 수 있다. 이럴 때 금리를 낮춰도 실물 경제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우리 경제는 유동성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가계가 소비를 줄이고 기업이 투자를 축소하여 시중 유동성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경제 활동이 위축되니 돈이 필요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더하여 금리 수준도 충분히 낮아 추가적인 금리 인하의 한계적 효용도 떨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우리도 제로 금리 상황인 나라들처럼 한자리 수의 통화승수를 볼지도 모를 일이다.

국내 경제는 내수 침체가 장기화되고 체감 경기가 악화되면서 경기부양에 대한 필요성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2년 3/4분기 이래 현재까지 9분기 연속으로 실적 GDP가 잠재 GDP를 밑도는 디플레이션갭이 이어지고 있다. 소비자물가도 2012년 11월(1.6%)부터 2014년 12월(0.8%)까지 26개월 연속 2% 미만에 머물면서 디플레이션 진입 논란까지 대두된 상태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2.00%까지 낮췄으나 경기 회복의 징후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유가 급락으로 소비자물가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나마 담배세 인상이 구원투수로 나서지 않았다면 물가는 1% 미만으로 주저앉을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완화적 통화 정책은 의미가 없다. 추가 금리 인하가 경기를 되살려주는 효과는 미미하거나, 아무리 많이 봐줘도 제한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가계부채만 눈덩이처럼 커지는 부작용이 훨씬 우려된다. 여기에 더하여 사상 초유의 1%대 금리가 국민들을 디플레이션의 불안 심리로 몰아간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이제부터는 가계부채 관리와 경기 부양적 재정정책이 관건이다. 우선 가계부채는 이미 소비를 제약할 정도로 늘어났다. 부채 원리금 상환 부담이 이미 가처분소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러다보니 소비가 살아날리 없고 경기도 동반 침체되는 악순환 이다. 더구나 2%의 초저금리가 정부의 부동산 활성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가계부채가 늘어나게 되면 그때는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경기를 죽이지 않으면서 디레버리징도 단행해야하는 묘수풀이 정책이 필요하다.

결국 재정의 역할 확대가 답이다. 확장적 재정 정책을 통하여 가계의 소득을 늘려주는 정책은 기본이다. 특히 저부가 내수 업종, 한계 및 차상위계층, 자영업 및 임시·일용직에 정책의 초점이 집중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만에 하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가계부채 대란에 대비하여 한계 가구의 부채 탕감도 단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럴 해저드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있는 것은 알지만 그냥 놔두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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