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너도 나도 지쳐있는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나란 무엇일까’. 살면서 누구라도 느껴봤을 법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은’ 피곤한 현실이 드라마로 고스란히 반영됐다. 수목 밤 10시, ‘다중인격’ 소재로 한 ‘킬미 힐미’(MBC)와 ‘하이드 지킬 나’(SBS)다. 드라마의 인기에 최근 흥미로운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취업포털 사이트 미디어잡과 취업전문지 워크데일리는 26일 대한민국 직장인 41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무려 82.3%가 “직장생활에서 스스로 해리성 인격장애를 느낀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특히 ‘언제 이(다)중인격이라고 느끼는가’에 대한 답으로는 ‘상대방에 따라서 너무 다른 태도를 보일 때’가 33%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뒤에서 상사 욕하다가 앞에서는 감언이설로 띄어줄 때’(21%), 3위 ‘상사가 전에 지시했던 내용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행동할 때’(16%), 4위 ‘평소 나태하다가 연봉협상 시기에 일 열심히 할 때’(13%), 5위 ‘당장 그만둬야지 하면서 일 열심히 할 때’(9%), 6위 ‘회사에서 찌질하다가 퇴근 전 예쁘게 변신할 때’(6%), 7위 ‘평소 얌전하다가 회식 술자리에서 돌변할 때’(2%)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사실 이 설문이 의미하는 다중인격, 혹은 이중인격은 의학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가 말하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본질에선 벗어난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핵심은 주인인격이 만들어낸 다수의 인격이 독립적으로 행동할 때, 이 모든 행동을 주인 인격이 기억하느냐에 있다.
‘킬미 힐미’의 경우, 배우 지성은 총 7개의 인격을 연기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지난 25일 방송에선 이 같은 장애를 극복할 만한 단서가 두 번에 걸쳐 제공됐다.
지성이 연기하는 7명 중 주인인격, 즉 제1인격은 따뜻한 재벌3세 차도현이다. 차도현은 자기 외의 6명과 몸을 나눠쓰며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당연히 다른 인격이 됐을 때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과거의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고 ‘융합치료’를 통해 온전히 차도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날 방송에선 놀랍게도 차도현이 제2인격 신세기의 행동을 기억하는 장면이 두 번에 걸쳐 나타났다.
오리진(황정음 분)이 납치된 것을 두고 “당신은 승진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며 울분을 토하는 쌍둥이 오빠 오리온(박서준 분)을 통해 다른 인격 신세기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도 그랬다. 오리진의 납치를 사주한 어머니를 향한 절망을 쏟아내던 차도현은 앞서 제2인격 신세기가 어머니를 향해 같은 분노를 퍼붓던 기억을 또 한 번 떠올렸다.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려가겠다는 목표로 출발한 드라마는 이제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향해 충실히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남자주인공의 다중인격이 융합되는 과정까지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의 말미엔 “죽여야 살 수 있는” 운명의 남자가 오롯이 한 사람으로 서는 모습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차도현이 험난한 삶 속에서 끝까지 젠틀하고 선량한 차도현의 모습으로만 살아가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드라마 바깥 세상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중인격’이라 느낄 만큼 ‘가면’을 써야하는 비애를 안는 것처럼, 재벌3세이니 그 같은 고충이 없다면, 자신의 어머니나 무서운 할머니, 연인에 따라 저마다 다른 방식과 모습으로 대할 수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외롭고 처절한 싸움’을 벗어난다면, 사람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하는 혹은 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은 꽤 보편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최근 출간한 ‘나란 무엇인가’라는 에세이를 통해 이렇게 적었다. “한 명의 인간은 나눌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복수로 나눌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하나의 ‘진정한 나’, 수미일관 ‘흔들리지 않는’ 본래의 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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