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제 ‘자막’ 없는 예능 프로그램은 상상할 수 없게 됐다. 출연자들의 이야기를 옮기고, 정보를 전달하던 단계를 지나 제작진은 관찰자가 돼 상황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단계가 됐다. 예능에서 ‘자막’은 프로그램의 재미를 담당하는 ‘제3의 멤버’다.
자막의 역할이 커지다 보니 양도 늘었다.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소속 방송언어특별위원회는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 MBC ‘무한도전’, tvN ‘꽃보다 청춘-아이슬랜드’ 등 3개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자막 사용과 수용변화를 조사한 결과, 약 3초당 한 번 꼴로 자막이 등장한다고 밝혔다.
‘무한도전’은 80분 방송시간 중 1616개의 자막이 노출됐다. 평균 2.97초당 1개 꼴이었다. ‘1박2일’은 80분 중 1433개로 3.35초당 1개, ‘꽃보다 청춘’은 90분 중 1372개로 3.93초당 1개 꼴로 자막을 방송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자막 공해’라고 할 만하다. 일각에선 무분별한 자막 노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전히 출연자 대사를 그대로 옮기는 사례(무한도전 765건, 꽃보다 청춘 637건, 1박2일 442건)가 많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막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였다. 현재 중국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 중인 김영희 PD는 과거 한 프로그램에서 “후지TV에서 6개월 연수를 받은 뒤 돌아와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자막이었다”고 밝혔다. 단순 ‘정보 전달’뿐 아니라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자막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 안에 자막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엔 시청자들의 반발과 항의도 적지 않았지만, 이후 모든 예능 프로그램이 자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예능 프로그램 안에서의 ‘자막’은 진화를 거듭했다. 출연자들의 대화를 ‘받아쓰기’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멤버들이 웃고 떠들고,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에도 자막은 쉴새없이 움직이며 프로그램에 활기를 넣는다.
한 지상파 방송사의 예능PD는 “자막은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여백을 채워주며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한 회차 동안 제작진의 의도가 가장 적극적으로 전달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무한도전’은 특히 자막을 통해 사회이슈 등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의미를 부여하는 데의 달인이다.
사실 자막을 넣는 과정에서 오는 노고는 만만치 않다. 리얼 버라이어티나 관찰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녹화시간이 1박2일 이상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후편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그 이상이다. 실내가 됐든 실외가 됐든 곳곳에 자리 잡은 카메라를 돌려가며 현장에서 미처 보지 못 했던 장면들을 포착하고, 그 장면을 빛나게 할 자막을 넣는 것이 프로그램에선 고난도 기술이자 전략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녹화를 마치면 메인PD와 조연출의 ‘편집 전쟁’이 시작된다. 매일 하나의 업무씩을 해나간다고 보면 된다. 1차 편집 이후 하루의 시간을 들여 가편집에 돌입하고, 가편집이 나오면 그 다음날은 1차 시사를 가진다. 제작진이 모여 시사를 마친 이후 수정사항을 바탕으로 다시 편집에 돌입한다. 또 하루가 걸린다. 그 뒤에야 프로그램에 자막을 넣는다. 과거엔 작가들이 자막을 쓰는 일이 많았으나 최근엔 조연출은 물론 메인PD까지 자막 작업에 직ㆍ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대체로 조연출이 자막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조연출들은 촬영 영상을 일정한 순서대로 편집한 영상을 받아 구간을 나눠 가진다. 출연자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이 구간은 ‘자막을 삽입할 부분’이 된다. ‘무한도전’의 경우 ‘유재석 구간’, ‘정글의 법칙’의 경우 ‘김병만 구간’, ‘1박2일’의 경우 ‘차태현 구간’이 되는 셈이다. 자막 작업을 마치면 미술부로 보내 컴퓨터 그래픽 및 폰트 작업을 한다.
3초의 한 번 꼴로 자막이 등장해 ‘자막 홍수’라고 부르지만 예능PD들에 따르면 자막을 넣는 가장 기본은 ‘3초에 한 줄’이다. 이 때 최대 글자수는 ‘14자’다. 띄어쓰기까지 포함한 숫자다. 짧고 간결하면서도 위트가 넘쳐야 하고, 상황을 최대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막에 ‘줄임말’과 유행하는 신조어가 많이 등장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 예능PD는 “평범하고 뻔한 자막, 출연자들의 대사를 옮기지 않기 위해 고민을 많이 한다. 재미있는 자막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며 “프로그램마다 다르겠지만 1분 자막을 쓰는데 1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고 했다. 스쳐 지나가는 웃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들어가는 공력이 만만치 않은 셈이다. 그 덕에 ‘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같은 ‘자막의 신기원’을 연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최근엔 자막으로 논란에 휘말리는 등 잡음도 적지 않아 PD들도 신경써야 할 부분이 늘었다. 한 방송사의 예능PD는 “맞춤법은 기본이고 요즘엔 ‘인터넷 용어’에 대한 제재가 많고, ‘일베 용어’ 등을 모르고 썼다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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