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락에선 레고가 씨익 웃는다. 머리 위 모자에선 몬스터가 눈을 부릅 뜬다. 레깅스엔 왜 구멍을 냈을까. 알록달록한 컬러도 모자라 과장된 프린트로 어느 곳 하나 눈이 쉴 수 없다. 꼭 일렉트로니카 음악 같다. 베이스와 드럼이 중저음으로 쩌렁쩌렁 울리고, 그 위에 콧소리가 섞인 보컬의 찌르는 목소리와 시큼한 기계음들이 얹어졌다. 너무 꽉 채워진 음악에 귀가 피곤해도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런 옷을 입은 내 눈 앞의 이 여자, 몇 분 전 일본 만화 안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것 같다. (서울 상수동, 28ㆍ박모 씨)
지난 한 해 대한민국은 키치 열풍이었다. 가요계가 중심이 됐다. 걸그룹 2NE1의 등장, 섹시퀸 이효리의 귀환, 걸그룹 애프터스쿨의 유닛 오렌지캬라멜. 여기에 빅뱅을 빼놓는다면 서운하지만 그 ‘키치 패션’에선 그녀들이 대세이니 잠시 성별을 가르기로 한다. 그녀들의 의상을 보니 참으로 유치하다. 그런데 유치해도 좋다고 한다. 아니 유치할수록 더 좋다고 한다.
2010년 과장돼 보여 부담스러웠던 ‘키치 패션’은 이제 아이돌 멤버들의 사복패션으로 사소하고 무심한 듯한 소품으로 파고들며 진화를 시작한다. 소녀시대도 박정현도 공효진도 알게 모르게 ‘키치 패션’을 걸쳤다.
일단 키치부터 알고 가자. 고루해도 어원부터. 키치(Kitsch)란 이런 거다. 독일어로 ‘저속한 것’을 뜻하는 말. 정통에 대한 이단, 진짜에 대한 가짜 정도로 풀이된다. 고급스럽기보다는 대중적이며 틀에 얽매이지 않은 것, 유치하게 장식하거나 장난스러운 디자인이 돋보이는 패션이다.
맞다. “문방구에 가니 초딩들의 손가락에나 맞을 유리알 반지들이 즐비해있다. 어릴적 생각이 문득 스쳐 나도 한 번 껴보려다 순간 머뭇거린다. 이미 반지 앞은 조그만 녀석들이 점령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유치원에 다니는 늦둥이 동생이나 조카가 있다면 잠시 빌려도 된다. 키치 패션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작든 크든 아기자기하고 아이같은 소품들이면 오케이다. 사실상 키치가 세계 패션계에 처음 돌풍을 일으켰던 것은 1971년 가을 파리에서다. 히피 패션의 변형으로 보았던 당시의 키치 패션은 ‘통속적인 취향’의 패션을 일컫곤 했다. 그리 좋지 않은 소재의 옷감에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부조화 속에서 색감을 찾았다. 고급스럽거나 우아해보이려 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몸에 맞지 않는 듯 보이는 작은 옷을 입거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상을 매치하고 부조화스러운 의상과 아이템을 마구 뒤섞은 것이 바로 키치 패션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야 단연 2NE1이지만 팝시장으로 가면 키치 패션의 대명사엔 노다웃(No Doubt)의 그웬 스테파니, 레이디가가, 모델 아기네스 딘으로 귀결된다. 마돈나의 뒤를 잇는 금발의 섹시퀸이 키치 패션이라니, 그녀의 고전적인 외모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지만 자기 성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그웬 스테파니에겐 ‘나는 나’임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일 법하다.
그러니 기존의 걸그룹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선보이는 2NE1에겐 안성맞춤의 패션일 수밖에 없다. 톡톡 쏘는 애시드나 비비드 컬러의 셔츠, 일부러 못에 긁히기라도 한 듯한 데님, 과장된 프린트로 팝아트를 연상케하는 면티셔츠, 망사로 만든 스커트에 이르기까지 익살스럽고 재치있는 스타일은 이들을 중심으로 거리로 퍼져갔다.
물론 그 뒤엔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의상들이 자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보다 우주적으로 뻗어가도 시원찮을 이 스마트한 시대에 미우미우(MIUMIU), 마크 바이 마크제이콥스(Marc By Marcjacobs) 등은 지난해 매니멀 프린트와 비비드한 컬러로 화사한 봄을 열어제쳤다. 칼 라거펠트의 후계자이자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의 콜래보레이션 디자이너 제레미 스콧(Jeremy Scott)은 만화 ‘고인돌 가족 프린스톤’을 패러디한 룩으로 런웨이를 수놓았던 것.
단지 과장되고 유머러스한 키덜트(Kidult:키드(kid·아이)와 어덜트(adult·어른)의 합성어로 20, 30대의 어른이 됐는데도 여전히 어렸을 적의 분위기와 감성을 간직한 성인들)적 감성이 부담스러워 피했다면 2011년 이들에게서 키치 패션을 익히는 것도 방법이다. 보다 진화한 키치룩, 단 하나의 액세서리나 단 하나의 의상으로 키치 감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생각보다 쉽고 간결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나는 나”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소녀시대부터 시작한다. 지난 달 27일 MBC ‘놀러와’의 골방 토크를 보니 티파니의 의상이 심상치 않았다. 블랙 컬러의 토끼 프린트 티셔츠가 돋보이는 비비드한 옐로우 색상의 트레이닝복이었다. 할리우드 스타 제시카알바와 패리스 힐튼도 즐겨입는다는 로렌모쉬의 이 트레이닝복으로 편안함과 동시에 키덜트 감성까지 살렸다. 이 때 효연은 민소매 스타일에 팔에 장난기 가득한 인형이 달린 팔찌로 포인트를 줘 키치 패션을 선보였다.
최근 ‘나는 가수다’를 통해 활약하고 있는 가수 박정현은 여성스러운 정장 재킷에 레드 컬러의 블링블링한 입술모양의 반지로 포인트를 줘 나름의 키치 룩을 연출했고,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서 공효진은 치아를 드러낸 몬스터 모자나 하트 모양의 선글래스 등을 착용하며 키덜트 감성을 전파하며 키치 패션의 진화를 알렸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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