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사우디 원자력 협정안 공식 승인

2년 공동연구후 타당성 입증시 농축시설 건설

외신들 “발효 땐 사우디에 농축·재처리 허용”

UAE에 요구한 농축포기 ‘골드 스탠더드’ 빠져

美·사우디 “평화적 이용·中·러 견제” 강조에도

‘민간용→군사용 출발점’ 중동 핵경쟁 촉발 가능

이란 압박 명분도 약화…美의회 90일 심사 주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미국 델라웨어주 도버 공군기지에서 거행된 미군 유해이송식에서 유해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앞서 17일 요르단 미 공군기지에서 이란 미사일이 숙소 막사를 강타해 미 육군 방공여단 소속 장병 3명이 숨졌다. [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미국 델라웨어주 도버 공군기지에서 거행된 미군 유해이송식에서 유해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앞서 17일 요르단 미 공군기지에서 이란 미사일이 숙소 막사를 강타해 미 육군 방공여단 소속 장병 3명이 숨졌다. [로이터]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체결한 민간 원자력 협정의 핵심 쟁점은 원전 건설이 아니라 사우디가 자국에서 우라늄을 농축하고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다. 두 기술 모두 원전 연료를 만드는 데 쓰이지만 핵무기용 핵물질을 생산하는 경로가 될 수도 있어 중동의 핵확산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 에너지부가 22일(현지시간) 발표한 성명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농축 및 재처리 관련 내용은 구체적으로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번 협정에는 사우디가 우라늄 연료를 수입하는 대신 자국 영토 내에서 우라늄을 농축하는 것이 상업적으로 타당한지에 대한 공동 연구를 2년간 수행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 결과 우라늄 농축 필요성이 인정되면 철저한 보안 조치가 이뤄진 상태에서 우라늄 농축 시설을 건설하게 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뉴욕타임스(NYT)·로이터통신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미국이 사우디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원전 연료를 위한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플루토늄 추출) 기술을 이전하되, 농축·재처리에는 미국 인력만 접근을 허용하는 ‘블랙박스’ 방식이 거론된다.

이는 ‘핵물질 농축·재처리·이전은 미국 승인 없이 불가능하다’는 기존 123 협정의 핵심 조항에 미국 대통령이 면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NYT는 짚었다. 의회조사국에 따르면 미국이 51개국과 체결한 기존 협정 26건은 모두 면제 조치 없이 승인됐다.

‘123협정’은 미국 원자력법 제123조에 근거한 협정이다. 미국 기업이 해외에 원자로와 핵연료, 원자력 기술을 수출하기 위한 법적 틀이자 상대국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다. 미국은 그동안 이 협정을 통해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제한 등 핵비확산 원칙을 관철해 왔다.

사우디는 이미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국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도 받아왔다. 이번 원자력 협정 역시 탄소배출을 줄이고 발전용으로 소비하는 원유를 수출로 돌리려는 ‘비전 2030’ 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사우디가 오래전부터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우리도 뒤따를 것”이라고 공언해온 데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탈탄소 비전 이면에 전략적 핵 역량 확보 의도도 있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제기돼 왔다. 이에 조지 W. 부시·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우라늄 농축 포기와 IAEA 추가의정서 가입 등 강화된 안전장치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협정에 포함하지 않았다. 실제 이번 협정에는 미국이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와 체결한 123협정의 핵심인 ‘골드 스탠더드’가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UAE는 미국 원전 기술을 도입하는 대신 자국 내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모두 포기하고 IAEA의 강화된 사찰을 수용했다. 미국은 이를 핵비확산의 모범 사례로 평가해왔지만 사우디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

원자력 발전 국가 가운데 상당수는 우라늄을 자체 농축하지 않고 원자로용 핵연료를 해외에서 수입한다. 반면 사우디는 자국에 매장된 우라늄을 직접 농축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원전 연료는 통상 3~5% 수준의 저농축우라늄을 사용하지만, 같은 시설에서 농축도를 계속 높이면 핵무기용 고농축우라늄 생산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미국 의회와 비확산 전문가들이 농축시설 자체를 민감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국제사회는 이번 협정이 중동의 핵 군비 경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민주당 소속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은 협정 발표 직후 엑스(X)에 “이번 협정은 중동의 핵 군비 경쟁을 촉발하고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제한할 동기를 더욱 잃게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이란에는 우라늄 농축 포기를 요구하면서 사우디에는 농축 가능성을 열어준 만큼 핵 협상에서 이란을 압박할 명분도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핵심 동맹인 이스라엘도 사우디의 민간 원전 프로그램에 대해 오래전부터 우려를 표시해왔다. 이란에 이어 사우디까지 우라늄 농축 능력을 확보할 경우 역내 전략 균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출신 아비그도르 리베르만은 “모든 군사용 핵 프로그램은 민간 프로그램에서 시작된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이 같은 논란을 감수하면서도 협정을 추진한 것은 전략적·경제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원자로 설계·건설을 담당하는 미국 대표 원전기업 웨스팅하우스의 원전 수주 기회를 확보하는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의 중동 원전시장 진출을 견제할 수 있다. 사우디 역시 원전을 통해 발전용 석유 소비를 줄여 원유 수출을 늘리고 에너지 다변화를 추진할 수 있다. 협정이 무산될 경우 중국 국영 중국핵공업집단(CNNC),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사톰, UAE 원전을 수주했던 한국과 프랑스 등이 사우디 원전 사업을 가져갈 가능성이 거론된다.

향후 미 의회의 핵심 쟁점은 사우디 영토 내 우라늄 농축시설 건설 여부와 운영 방식이 될 전망이다. 미국 기술자만 시설을 운영하는 ‘블랙박스’ 방식이 거론되지만, 로이터는 협정이 발효되더라도 미국이 사우디에 우라늄 농축 기술이나 시설 운영 역량을 이전해야 할 의무까지 지는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의회의 90일 심사 과정에서도 사우디의 농축 권한과 국제 사찰 수준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지연·도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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