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새벽, 서울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동해로 향한다. 목적지는 정동진이다.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터진다. 비슷한 활력은 남해안에서도 나타난다. 서울에서 KTX를 타면 세 시간 남짓 만에 여수와 순천에 닿는다. 주말이면 여수 밤바다와 순천만 습지를 찾는 여행객들로 역과 도시는 북적인다.
주민등록 인구는 줄어들고 있지만 일부 관광·교통 거점에서는 주말 활동인구와 체류 수요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수도권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머물며 소비와 경험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 성장은 어디서 오는가. 한국 사회의 많은 논의는 여전히 인구 규모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인구 감소가 현실이 된 시대에 성장의 원리를 사람 수에서만 찾는다면 해답을 얻기 어렵다.
2022년 OECD 회원국의 평균 합계출산율은 1.51명으로, 인구 유지에 필요한 2.1명을 크게 밑돌았다. 한국은 2023년 0.72명까지 떨어진 뒤 2024년부터 2년 연속 반등해 2025년 0.80명을 기록했지만,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이다. 저출생과 고령화는 이제 주요 선진국이 함께 맞닥뜨린 구조적 변화다.
경제 성장은 사람 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디에 모이고 얼마나 오래 머물며, 그곳에서 어떤 교류와 경제활동을 만들어내느냐다. 도시경제학에서는 사람과 기업, 자본과 정보가 특정 공간에 모이면서 생산성과 혁신이 높아지는 현상을 ‘집적경제(agglomeration economics)’라고 부른다. 결국 성장 전략의 핵심은 공간의 밀도와 연결성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있다.
다만 이동 자체가 곧 성장은 아니다. 이동이 생산과 소비, 정보와 지식의 교류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집적의 효과가 나타난다. 이제 도시를 평가하는 기준도 상주인구에서 통근과 관광, 업무와 문화활동을 포함한 생활인구와 체류시간으로 넓혀야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은 국가 공간구조를 바꾸기 위해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통한 혁신도시 조성, 민간 주도의 기업도시 개발 등을 추진해 왔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공공기관을 이전하는 것만으로 도시가 살아날까. 일부 혁신도시는 낮에는 일하지만 밤과 주말에는 활력이 떨어지는 도시로 남아 있다. 기관은 옮겨갔지만 사람들이 머물고 생활할 주거·교육·문화·상업 환경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시는 행정적 배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과 기업, 소비와 문화가 함께 모일 때 비로소 도시의 경제가 형성된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분산이 아니라 연결된 공간에서 경제활동의 밀도를 높이는 일이다.
철도와 역세권 개발을 결합한 대표적 사례로는 일본 도쿄를 들 수 있다. 일본 전체 인구는 감소하고 있지만 도쿄에는 인구와 경제 기능의 집중이 이어지고 있다.
시부야와 마루노우치, 롯폰기 등은 대형 철도역을 중심으로 업무·상업·주거·문화 기능이 결합된 복합 공간으로 발전했다. 철도망과 역세권 개발을 함께 추진하면서 역은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며 소비하는 경제 거점이 됐다. 이러한 거점들이 촘촘한 철도망으로 연결되면서 도쿄권 전체의 활동 밀도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의 그랑 파리 익스프레스도 같은 방향을 보여준다. 파리와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약 200㎞의 광역도시철도망과 68개 역을 건설하면서 역 주변 개발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핵심은 외곽 지역을 파리 도심과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거와 업무, 연구와 문화가 결합된 새로운 생활·경제 거점을 만드는 데 있다. 철도와 도시개발을 동시에 설계해 파리와 주변 도시를 하나의 광역경제권으로 묶으려는 전략이다.
네덜란드의 란트스타트는 연결 전략이 국토 차원으로 확장된 사례다.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위트레흐트 등이 철도와 도로, 항만·물류망으로 연결된 다핵 도시권을 이룬다. 각 도시의 금융·문화, 항만·물류, 행정·국제기구, 교통·지식 기반이 서로 연결돼 하나의 경제 플랫폼처럼 작동한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산업이나 기관을 단순히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교통망과 도시 기능을 결합해 경제활동의 밀도를 높였다는 점이다. 각 거점의 강점을 살리면서 빠른 교통망으로 연결해 더 큰 경제권을 만들어냈다. 도시의 경쟁력은 행정구역의 크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동하고 머무는 공간의 연결 구조에서 만들어진다.
한국에서도 변화의 기반은 마련되고 있다. 2025년 KTX와 SRT 등 고속철도 이용객은 1억1900만 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수도권에서는 GTX가 단계적으로 개통·구축되면서 서울과 수도권 주요 도시를 30분대 생활권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공간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도시의 경계가 행정구역보다 이동 시간에 의해 다시 정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올해 수도권 일극 체제를 ‘5극3특’의 다극 체제로 전환하는 국가균형성장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권역별 성장엔진을 육성해 경쟁력 있는 광역경제권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점을 몇 개로 나누느냐가 아니다. 각 거점이 교통망과 산업, 대학과 연구기관을 통해 연결되고 충분한 경제 밀도를 형성하도록 설계하는 일이 핵심이다. 연결되지 않은 거점은 또 하나의 고립된 섬이 될 수 있다.
인구 감소 시대의 공간전략은 사람과 시설의 배분을 넘어 활동의 밀도와 연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첫째, 철도역을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며 머무는 도시 거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역 주변에 업무·주거·상업·문화 기능을 복합화해 하루 종일 활동이 이어지는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둘째, 모든 도시가 비슷한 산업과 시설을 갖추는 자족형 개발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별 도시의 강점을 살리고 이를 고속철도와 광역교통망으로 연결해 하나의 광역경제권, 즉 메가리전(megaregion)으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
셋째, 도시정책의 기준을 방문객 수에서 체류시간으로 넓혀야 한다. 문화시설과 공공공간, 보행환경, 관광·컨벤션 기능을 확충해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고 소비와 교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넷째, 공간정책과 산업정책을 하나의 전략으로 설계해야 한다. 연구개발과 창업, 문화산업이 거점에 모이고 대학과 기업이 연결될 때 도시의 공간적 밀도는 혁신의 밀도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략이 자리 잡는다면 동해안과 남해안, 서해안의 주요 도시들은 더 이상 ‘멀리 있는 지방 도시’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주말과 휴가, 문화와 관광, 산업과 연구가 이어지는 체류 도시이자 광역경제권의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수도권의 금융·연구 기능과 지역의 산업·관광 자원이 빠른 교통망으로 연결되면 한국은 여러 도시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작동하는 경제권으로 발전할 수 있다.
도시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를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보았다. 인구 감소 시대에도 도시의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람과 기관을 지역에 나누는 것만으로는 활력을 만들 수 없다. 이제 지역균형발전은 인구 배분에서 공간 설계로 전환돼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어디에 모이고 얼마나 오래 머물게 하느냐다. 밀도를 설계하는 국가만이 성장한다.
bon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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