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마포아트센터 상주음악가 무대

쇼팽 스케르초·슈베르트 소나타 20번

5년 전 “우주 속 먼지”라던 스물한 살

실패의 경험 딛고 쌓은 ‘반전의 대서사’

피아니스트 선율 [마포아트센터 제공]
피아니스트 선율 [마포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재능이 없는데 억지로 하는 것 같아요. 어차피 모든 사람은 우주 속의 먼지일 뿐인데, 무대에 불러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전례 없던 감염병이 전 세계를 잠식했던 지난 2021년. ‘영재’였고, 이름마저 ‘음악’을 하기 위해 태어난 듯했던 스물한 살 피아니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스크로 반쯤 가린 얼굴 뒤로 마주한 눈빛은 수줍고 떨렸다. 여느 연주자가 그렇듯 ‘극 I형’의 내성적인 성격이려니 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피아니스트 선율(26)의 눈엔 단단한 ‘자기 확신’이 채워졌다. 지독한 자기부정의 껍데기를 깨고 ‘온전한 나’를 찾아낸 사람만이 가지는 총명한 광채였다.

선율은 올해 마포문화재단 상주음악가로 선정돼 세 번의 무대로 관객과 만난다. 지난 6월 첫 무대 이후 다시 찾는 두 번째 무대(9월 16일, 마포아트센터)는 4주간의 훈련소 일정을 마치자마자 서는 공연이라 평소의 풍성한 머리 대신 짧은 머리로 피아노 앞에 앉는다. 공연에선 쇼팽의 ‘4개의 스케르초(Scherzo)’ 전곡을, 2부에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A장조(D.959)’를 올린다. 슈베르트는 학부 졸업 연주 이후 “다시는 안 친다”며 악보를 덮어버린 곡이다.

공연을 앞두고 만난 선율은 “올해의 챌린지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이라며 “나를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 도전했는데 안 됐다…나만 욕심 버리면 끝나는 줄”

그는 이름을 예술적으로 지어주신 부모님 덕에 “어떻게 이름마저 선율이냐”, “이메일 주소는 멜로디냐”는 질문을 늘 안고 다닌다. 이름에 걸맞게 음악계에선 일찌감치 영재로 주목받았다. 예원학교-서울예고-한국예술종합학교 조기 입학 등 엘리트 코스를 모두 섭렵했다.

학교에선 숙제와 연습 시간을 철저히 지키며 모난 구석 없이 “선생님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던”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음악계 관계자들은 “선율이라는 연주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성실함”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성실한 학생이 늘 꽃길을 걷는 것은 아니었다. 선율의 성실함 뒤론 잔혹한 암흑기가 이어졌다. 동기, 선후배가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낼 때 선율은 의미 있는 성적표를 얻지 못했다. 그는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콩쿠르에 단 한 번도 큰 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며 “콩쿠르에 나가지 않은 게 아니라, 꾸준히 도전했는데 안 됐다”고 돌아봤다.

당시 그에게 가장 무서웠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었다. 실패가 반복되자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를 방황과 역경의 굴레에 가둬버렸다.

“처음엔 ‘쟤도 그냥 한물간, 어렸을 때 반짝이던 친구였구나’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게 목표였어요. 그러다가 ‘아, 난 정말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하고 인정하며, 저 스스로 저를 믿지 못하게 된 거죠.”

피아니스트 선율 [마포아트센터 제공]
피아니스트 선율 [마포아트센터 제공]

대학 3~4학년쯤부턴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괴로웠다. 그러다 4학년 1학기 무렵, 콩쿠르 접수를 하려다 자신의 이름 뒤에 적을 수상 내역이 하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절망한다. 당시를 떠올리며 선율은 체념처럼 어머니께 고백했다. “엄마, 나 8년 동안 커리어가 하나도 없어.”

“당시 난 정말 재능이 없는 건가, 이제 정말 끝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5년 전부터 그 이후에도, 더 이상 피아노를 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 다니는 것도 싫고 힘드니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내가 나만 욕심을 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스로 바닥을 봤다고 느낀 그때, 그는 평생 걸어온 ‘안전한 트랙’에서 벗어났다. 어른들의 말을 거역한 적 없던 모범생이 생애 처음으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유학을 결심하면서다. 행선지는 클래식 학도들이 흔히 가는 곳이 아니었다. 주변에선 독일을 권했지만, 그는 프랑스 파리를 택했다. 그때가 2022년이었다.

“전 여태껏 제가 스스로 원한 선택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유학이 처음이었어요. 항상 하라는 대로 하는, 말 잘 듣는 학생이었는데 처음으로 고집을 부리니 다들 많이 놀라고, 반대도 심했어요.”

피아니스트 선율 [마포아트센터 제공]
피아니스트 선율 [마포아트센터 제공]

독일 대신 프랑스로 간 것도 의외의 선택이었다. 선율에게 파리는 정보가 없고 익숙하지도 않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는 “변화가 필요했는데 변화를 위해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삶을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는 곳으로 정했다”고 했다.

심지어 프랑스 음악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유학 전까지 그가 쳐본 프랑스 곡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와 드뷔시의 ‘피아노를 위하여’ 등 단 두 곡뿐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던 그에겐 두려움의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잘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스스로 원했으니까 여기선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확신은 있었어요. 어차피 바닥을 봤기에, ‘이보다 안 좋은 게 있을까’ 싶었거든요.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 도리어 확실하게 치고 나갈 수 있었고요.”

배수진을 치고 떠난 파리에서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는 “뭐가 됐든 스물다섯까지만 해보자고 마음먹었다”면서 파리에서 공부하며 콩쿠르도 꾸준히 나갔다. 마치 의도한 전략처럼 그는 파리에 둥지를 튼 이후 콩쿠르를 휩쓸기 시작했다. 2023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2위를 했고, 2024년엔 3월 마리아 카날스 콩쿠르, 4월 이스탄불 오케스트라 시온 국제 피아노 콩쿠르 등에서 입상한 데 이어 6월 바카우어에선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이후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도 1위에 오르면서 1년 새 출전한 4개 콩쿠르에서 모두 입상하는 ‘반전 서사’를 작성했다.

“그동안 떨어지는 게 익숙해지다 보니 상을 받으면서도 ‘나한테 왜 주지?’라는 생각이 첫 번째로 들었어요. 그러다 서울국제음악콩쿠르를 마친 뒤엔 ‘아, 이젠 어느 정도 경험이 쌓였구나’라는 자각이 들었어요.”

“단점 숨기려 음표 많은 곡만…이제는 안전한 연주 깰 것”

선율의 이름 뒤엔 늘 ‘완벽한 테크닉’이라는 수식어가 따라온다. 하지만 그는 “테크닉이 뛰어난지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다만 테크닉이 돋보이는 곡을 늘 연주한 건 빈약한 내공을 감추기 위한 ‘도피처’였다고 고백한다.

“콩쿠르는 장점을 보여줘야 하는 무대이니 제 단점을 숨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스스로 표현력과 내공이 매우 부족하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음표가 많은 곡을 치는 걸 선호했어요. 항상 음표가 많았던 19~20세기 작품, 21세기 작품 위주로 골랐고, 바로크나 고전·낭만 정통 시대 프로그램은 피해 왔어요. 템포가 빠르거나 생동감이 있는 곡들이 저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선율은 자신의 ‘인생 스승’으로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프랑스 유학 시절에 만난 올리비에 갸르동 교수를 꼽는다. 그는 “두 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도, 레슨 방식도 비슷하다”고 돌아본다. 두 스승의 ‘결정적 차이’는 지금의 선율을 만드는 토양이 됐다.

피아니스트 선율 [마포아트센터 제공]
피아니스트 선율 [마포아트센터 제공]

“차이점은 김대진 선생님은 학부 시절 동안 제 단점을 보완해 주시는 데 큰 힘을 쓰셨어요. 김대진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프랑스에 갔어도 많이 흔들렸을 거예요. 반면 갸르동 선생님은 제 장점을 부각해 주셨고요. 김대진 선생님께서 그때 해주신 말씀이 갸르동 선생님한테 배우면서 “아, 그 말씀이 이런 의미였구나”라고 깨달은 것도 많아요.”

갸르동 교수가 선율에게 강조하는 것은 ‘정면 돌파’였다. 회피하지 말고 부족한 면을 채우라는 주문이었다. 선율은 “작년부터 독일 레퍼토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며 “음표가 없는 공간을 채우는 미학에 대해 공부하며, 내공을 좀 많이 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상주음악가로 선보일 슈베르트 소나타 20번은 바로 그 치열한 직면의 결과물이다. 그는 “한예종 때 졸업 연주로 선택했다가 너무 부족해 스스로 크게 실망했다”며 “다시는 안 친다고 치워뒀는데 선생님께서 계속 추천해 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주음악가 제안을 받고 사실 처음으로 떠올렸던 곡도 슈베르트 소나타였다”고 귀띔했다.

“사실 너무 겁이 나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지막 곡으로 넣었어요. 언제까지나 제가 테크닉만 돋보이는 작품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이제는 이런 저를 좀 탈피하고 싶었어요. 사실 가장 어려운 곡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작이 어려워야 도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느리지만 천천히, 한 계단씩 밟으며 자기 확신을 쌓고 있는 그는 연주에 임하는 태도 역시 이전과는 달라졌다. 선율은 “항상 안전한 연주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며 “근데 요즘은 많이 깨부수고 있다. 욕먹는 게 별로 두렵지 않다”고 했다.

“요즘엔 사람들에게 논란이 되는 게 좋은 연주라는 생각도 들어요. 저희가 연주하는 곡들도 그 당시에 화제를 부를 만했기 때문에 유명한 거잖아요. 원래 생각했던 아이디어 중에 ‘이건 너무 과한가?’ 싶은 것들을 예전엔 항상 쳐냈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요.”

많은 무대에 섰지만, 아직도 선율에겐 편안한 무대는 없다. 그는 “콩쿠르 나가면 동년배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어 재밌다”면서도 “극심한 무대 공포증 탓에 콩쿠르 직전 늘 후회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콘서트 무대에선 시작 5분 전에야 연주복을 갈아입을 만큼 두려움과 싸운다. 그럼에도 무대에서 피아노와 일대일이 되는 그 순간, 선율은 ‘통역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몰입한다.

선율은 “음표가 알파벳이고, 작곡가가 알파벳으로 글을 써놓은 걸 연주자들이 통역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연주자의 의견이 더 들어가서 작곡가의 글을 해치면 안 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담는 건 좋지만, 대신 작곡가와 같은 의견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대 중반 선율의 지난 시간은 다사다난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었고’,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자기 길을 찾았다. 예술체육요원으로 복무하며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율은 불안한 미래를 움켜쥔 아이들에게 자기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같은 길을 걸어봤기에 그 마음을 누구보다 절감한다.

그는 “성공의 기준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정해야 한다”며 “힘든 순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 가장 쉬운 방법은 왜 아직 음악을 하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럼 ‘좋아서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쉽게 나온다”고 했다. 지난한 시간을 거쳐 와서일까. 지금의 그에겐 행복과 여유가 느긋하게 감돌았다.

“만약 음악이 싫어진다면 과감하게 떠나라고 말을 해주고 싶어요. 본인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게 인생의 성공이니까요. 사실 전 연주자로서 한없이 부족해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렇지만 사람으로선 그래도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제가 좋아서 끝까지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은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