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송금 이견에 최종 합의 난항

대미투자 국회 보고 지연 배경

年200억弗 절반 해당…재원마련 ‘비상’

외평기금에 정부보증채·해외차입 검토

자금납입 ‘45영업일이후’→ ‘45일이내’

미국이 한국에 연간 대미 투자금의 절반 가량을 올해 안에 현금으로 먼저 송금하라고 요구하면서 한·미 간 대미투자 1호 사업 양해각서(MOU) 서명·발표가 막판에 무산된 것으로 파악됐다. 구체적인 투자처와 사업별 투자 규모가 최종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연내 13조원 이상을 우선 송금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17일 정치권과 정부 안팎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한국 측에 연간 대미투자금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금액을 연말까지 송금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국은 대미 투자금 2000억달러를 10년에 걸쳐 연간 200억달러를 집행하는 방안을 협의해왔지만, 미국 측이 올해 안에 일정 규모의 현금 송금을 별도로 요구하면서 최종 합의에 제동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정부는 이달 첫 대미투자금으로 22억달러(약 2조9600억원) 이상을 미국에 송금한 뒤, 내년부터 연간 최대 200억달러 한도에서 투자 집행에 나서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그러나 미국 측이 올해 안에 연간 투자한도의 상당 부분을 먼저 현금으로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양국 간 이견이 커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오는 18일로 예정됐던 대미투자 MOU 발표 일정도 연기됐다. 당초 정부는 17일 국회에 협상 결과를 보고한 뒤 18일 MOU를 발표할 계획이었지만, 발표를 하루 앞두고 국회 보고와 후속 일정이 모두 미뤄진 것으로 파악됐다.

협상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대미투자 사업 선정과 관련해서는 최종적으로 정리된 상황에서 미국이 연말까지 무리하게 현금 송금을 요구하면서 산업부가 전날 국회에 17일 보고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안다”며 “이로 인해 MOU 체결 등 관련 일정이 모두 미뤄진 상황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회 최종 보고 일정까지 잡아놓고 막판에 미국 측으로부터 이런 요구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증거”라며 “협상 당국에 대한 신뢰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미 양국은 지난해 10월 한국의 대규모 투자를 조건으로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하면서 당시 우리나라는 조선 협력(1500억달러)과 전략적 투자(현금 2000억달러)를 포함해 총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대미 현금 투자의 경우 10년에 걸쳐 ‘연 200억달러’ 한도 내에서 분할 투자하도록 합의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당초 올해는 초기 사업 자금을 22억달러를 이달 말에 먼저 투입한 뒤 내년부터 연간 최대 200억달러 한도에서 투자 집행에 나설 방침이었다.

대미 투자금 재원은 한국은행과 외국환평형기금이 보유한 외환 자산을 활용하고 부족할 경우 정부 보증 채권 발행과 해외 금융기관 차입 등으로 충당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미국에서 현금송금을 올해안으로 연 투자금의 절반가량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면서 재원마련에도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투자금관련은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산업통상부보다는 재정경제부 담당이다보니 관련부처 합의절차도 거쳐야하다보니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대미 투자 집행과 관리를 전담하는 재경부 산하기관인 한미전략투자공사(KUIC)는 최대 20억달러를 발행하기 위해 국내외 주요 투자은행(IB)에 주관사 입찰제안요청서(RFP)를 발송했다. 다음 주 중으로 제안서 제출을 마감하고 서류 평가를 통과한 증권사 간 경쟁 프리젠테이션(PT) 절차를 거쳐 이달 말 주관사 윤곽이 나올 예정이다.

올해 6월 18일 공사 출범 이후 처음으로 발행하는 외화채로, 정부의 대미 투자금 조달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한미전략투자공사는 대미 투자 집행과 관리를 전담하기 위해 정부가 설립한 조직이다. 정부 보증이 붙어 국가 신용도와 동일한 수준의 크레딧으로 발행되는 건 긍정적이지만 전례가 없는 딜이라 해외 투자자들에게 발행 배경과 기대효과 등을 일일이 설득해야 하는 과정도 수반돼야 한다.

양국은 대미투자 프로젝트 사업 선정을 놓고 오랜 시간 협상을 벌인 끝에 텍사스 엔시날 가스복합화력발전소 건설과 대형 원전 건설 사업을 추진한다는 데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쟁점이 남아 있다.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 지분 투자를 둘러싼 줄다리기도 이어지고 있다. 앞서 한국 측이 웨스팅하우스 지분 15% 이상을 확보하는 방안이 거론됐으나 미국 측은 현재 그보다 낮은 5~10% 수준을 제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정부는 지난해 한·미 양국이 대미 투자 합의 내용을 담은 ‘한-미 전략적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MOU)’에 투자금 납입 시점을 사업 선정 통보 뒤 ‘최소 45영업일 이후’라고 기재했지만, 구체적인 투자 운영 방안에 해당되는 투자 특수목적법인(SPV) 운영계약엔 ‘45일 이내’로 정반대로 수정하기로 했다.

지난해 11월14일 체결한 대미 투자 MOU에는 투자 자금을 납입하는 시기에 대해 투자처 선정 통보 후 ‘45영업일보다 짧지 않은 날짜’라고 규정하고 있다. 투자처를 통보한 뒤 45영업일이 지난 뒤에 자금을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통상 납부 시한을 두고 자금 납입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투자계약과는 정반대로 규정된 셈이다. 규정대로면, 한국 정부가 수년 이상 차일피일 자금 납입을 미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과 미국 정부는 실제 투자 계획과 절차를 담은 투자 특수목적법인 운영계약에는 ‘45일 이내’로 이를 바로잡기로 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측의 갑작스러운 선송금 요구가 오는 11월 3일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 등 현지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대미 투자 합의의 가시적 성과를 조기에 확보하려는 미국 행정부의 의중이 반영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투자처와 사업별 집행 규모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액의 현금을 먼저 송금할 경우, 한국 정부의 재정·외환 부담은 물론 투자금 회수와 사업성 검증을 둘러싼 논란도 커질 수 있다.

배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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