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합창곡 ‘훈민정음’ 오병희 작곡가
작곡부터 극본까지…1년 공들인 작품
세종실록ㆍ훈민정음 해례본 등 역사 고증
‘용비어천가’, ‘월인청강지곡’, ‘여민락’
서양 합창 벽 넘어선 음악적 실험과 도전
BTS 슈가 ‘대취타’에 영감…동서양 컬래버
판소리 사설로 백성의 목소리 대변
“애민정신, 지금의 국민과 정치인에게 들리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용포를 입은 여섯 왕이 무대로 선다. 세종대왕 위로 여섯 대의 선조들. ‘해동 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이시니…(우리나라의 여섯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서, 하는 일마다 하늘의 복을 받으니)’ (‘용비어천가’ 중) 음악이 시작되면 하늘이 열리고, 땅이 일어난다. 국립합창단의 ‘훈민정음’(5월 31일·예술의전당)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용비어천가’는 한글로 만든 최초의 우리글이잖아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전하기 위한 일종의 신화인 거예요. 암전된 무대에 음악이 시작되고, 조명이 비추면 여섯 왕을 마주하게 되죠. 첫 구성회의 때 이 장면들을 그려봤어요. 무대를 압도하면서 자긍심이 차오르더라고요.”
지난해 10월 한글날 기념으로 초연한 국립합창단의 창작합창서사시 ‘훈민정음’이 돌아왔다. 작곡은 물론 극본에도 참여한 오병희 작곡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다시 무대에 오르는 ‘훈민정음’은 초연작을 세밀하게 다듬어 완성도를 높였다”고 말했다.
‘훈민정음’은 국립합창단의 ‘K-합창 클래식 시리즈’로 제작, 오병희 작곡가는 물론 극본에 탁계석, 연출과 각색에 안지선이 다시 한 번 의기투합했다. 1년의 기획과 창작 과정을 거친 이 작품은 위대한 유산인 훈민정음을 무대로 옮겼다.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은 역사의 고증과 탐구의 연속이었다.
“세종 5년에 ‘굶주린 백성들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세종실록에 나오더라고요. 고려 말기부터 이어진 대기근이 조선의 세종 대까지 이어졌던 거예요.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정말로 먹을 수 있는 흙이 있는지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백성들의 고통에 너무나 아파하고 함께 하려 한 세종의 애민사상이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도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과정이었어요.”
수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옮겨지는 역사 안에서 오 작곡가는 단 한 줄의 단서도 놓치지 않았다. 마치 그곳으로 다녀온듯 당시의 아픔을 절절히 공감했다. 그는 “이 시간들이 작품을 만들고 구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작곡가가 느끼지 못하면 음악을 듣는 사람 역시 느끼지 못해요. 작곡가가 느껴야만 전해질 수 있다는 책임과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총 3부로 구성되는 무대는 조선의 건국 과정과 시대상,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 반포 과정을 담았다. 가사 작업도 쉽지 않았다. 오 작곡가와 음악평론가 탁계석은 1년의 시간 동안 “새벽배송으로 가사를 주고 받으며 작품을 논의”했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여민락’ 등 기존 자료들을 각색하기도 했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도 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이야기는 고려 말기 승려인 나웅선사의 글을 개사해 ‘해와 달’(2부 2장)이라는 대목으로 담았다.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왕비 소헌왕후의 삶과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을 빗대 담은 구절”이다.
이 작품은 훈민정음이 창제 과정 못지 않게 음악에서도 실험과 도전을 이어간다. 동서양의 경계를 허물었고, 서양 합창의 벽을 넘어섰다. 역사와 역사를 바탕으로 한 상상과 추론이 음악으로 태어난다. 오 작곡가는 “조금 더 대중적이면서 즐겁고 흥미 있는 음악을 들려주면서도 역사를 다루는 만큼 지나치게 가볍지 않도록 균형을 맞췄다”고 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대목(3부 1장 ‘반포’)에선 왕의 행차와 전쟁 신호를 알릴 때 나오는 장엄한 행진곡인 ‘대취타’가 나온다. 서양 악기로 국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한국음악에 서양음악을 오버랩하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에요. 특히나 방탄소년단의 슈가가 ‘대취타’로 너무나 훌륭한 음악을 선보이며 전 세계인들에게 대취타를 들여다보게 만들었어요. 그걸 보고 많은 도전을 받았어요. 클래식에서도 우리의 음악을 어렵지 않고, 쉽게 들려줘야 한다는 책임의식도 생기더고요. 이 곡을 통해 왕실의 위엄과 무게를 보여주고자 했어요.”
훈민정음 해례본에 근거한 한글 창제의 원리, 단 스물 여덟 자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은 소리꾼 이봉근이 전달한다. “백성을 대변하는 목소리”이자, 음악적 재미와 흥미를 더한 부분이다. 오 작곡가는 “흥이 있으면서도 서러움과 슬픔이 담긴 소리를 오래 찾았다”며 “이봉근의 목소리에서 백성의 오랜 한과 설움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조선 초기 녹아있던 불교문화, 한글 창제에 영향을 준 외국 문화의 이국적 색채를 풀어냈다는 점이다.
“세종은 유능한 언어학자였지만, 창작 과정에선 분명히 주변 언어를 연구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거라 생각했어요. 태국어 힌디어 인도네시아어 등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언어와 불교 문화를 음악으로 풀었어요.”
10년간 비밀리에 한국을 창제한 세종의 이야기(2부 1장 ‘비밀의 방’)에선 신비로운 전통악기인 운라가 연주되고, 1부 4장 ‘어린 백성’에선 베이스 칼림바 연주가 나온다. “운라나 베이스 칼림바를 통해 토속적이면서도 동양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특히 베이스 칼림파는 베이스 기타와 같은 저항적인 느낌의 소리가 나요. 조선의 음악을 하는데 베이스 기타를 쓸 수는 없었지만, 보다 원시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새로운 소리에 도전하고 싶어 사용하게 됐어요.” 불교적 색채를 담기 위해 ‘목탁 소리’도 넣었다. 기독교를 근간으로 출발한 서양 합창에선 볼 수 없던 ‘도전적 시도’다. “조선의 문화를 보여주는 만큼 종교적 색채를 떠나 민족적인 부분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마누샤 마누샤(힌디어)마누시아(인도네시아어)’ 등 목탁을 치며 비슷한 발음의 여러 언어가 나오는 대목은 작품에서 가장 이국적 색채를 만날 수 있는 부분이다. 모두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 작곡가는 이 과정을 통해 “한글의 위대함과 우수성”은 물론 “세종의 애민사상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팬데믹으로 힘들었을 때 국민들의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었어요.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인에게도 백성을 소중히 여긴 왕의 마음, 애민사상을 들려주고 싶었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을 느껴 어려운 시기도 잘 이겨내고, 버텨낼 수 있으면 좋겠고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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