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거실이 된 숲세권 요새

리먼브러더스가 투자하기도

청와대 영빈관 설계팀이 만든 공간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타운하우스 단지 ‘어승재’. [장학건설 제공]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타운하우스 단지 ‘어승재’. [장학건설 제공]

[헤럴드경제=윤성현 기자] 서울 성북동에서 삼청각을 지나 삼청터널 뒷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언덕배기에 큼지막하게 둥지를 튼 타운하우스 하나가 눈에 띈다. 단지 입구의 울창한 수목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마주하게 되는 곳, 바로 성북동을 대표하는 고급주택 ‘어승재(御承齎)’다.

대한민국 전통 부촌 1번지인 성북동의 품격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아 거느릴 ‘어(御)’, 받들 ‘승(承)’, 집 ‘재(齎)’를 더해 이름을 지었다. 마치 어명(御命)을 받들듯 ‘높은 위치에서 남을 섬길 줄 아는 이들이 지내는 곳’이라는 뜻처럼, 이곳은 화려함보다는 폐쇄적이고 단아한 환경을 지향하는 인사들의 안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

1400평 대지 위 18가구…청와대 영빈관 설계팀이 빚은 공간

1400평의 광활한 대지에 정남향으로 자리 잡은 어승재는 A단지와 B단지로 나뉘어 각각 단독주택 같은 4가구, 4개동으로 이뤄진 14가구로 구성돼있다. 단지 내에는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피트니스 센터와 접견실 등 기본 편의시설을 갖췄다.

2004년 분양 당시 어승재는 용인, 파주 등 수도권에 집중됐던 타운하우스 열풍 속에서 서울 내 유일한 타운하우스라는 희소성을 강조하며 등장했다. 설계는 청와대 영빈관과 타워팰리스 B동 등 국내 최정상급 건축물의 인테리어를 담당한 ‘국보디자인’이 4년간 공들여 맡았다. 특히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글로벌 금융사인 리먼브러더스가 프로젝트 파이낸싱(PF) 형태로 사업에 투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시공은 고급 주택 전문 건설사인 장학건설이 담당했다. 장학건설은 2020년 용산구 UN빌리지에 들어선 ‘파르크 한남’을 비롯해 이태원 맥심 플래그쉽 스토어, 양재역 인근 SPC 사옥(SPC2023) 등을 시공하며 탄탄한 포트폴리오를 쌓아온 곳이다.

성북동 어승재 단지 내부 모습. [네이버 거리뷰 캡처]
성북동 어승재 단지 내부 모습. [네이버 거리뷰 캡처]

내부 인테리어의 핵심은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아웃사이드-인(Outside-In)’ 콘셉트다. 거실 3면을 통유리창으로 설계해 주변 경관이 마치 정원처럼 거실과 이어진다. 집 구조 역시 일반 주택과는 차별화된다. 자연 조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거실, 부엌, 식당, 서재를 외곽에 배치하고 침실을 안쪽으로 모으는 평면 구성을 취했다. 이는 가족 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도 도심에서 보기 드문 개방감을 선사하는 디자인이다.

품격에 걸맞은 시공 디테일도 눈에 띈다. 최고급 수입 자재를 사용하면서도 은은한 조명 시스템과 밝은 재질의 벽지를 활용해 눈의 피로를 덜고 단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중앙 조명 대신 보조조명과 간접조명을 곳곳에 배치했고, 빛 반사를 고려한 밝은 재질의 벽지를 사용했다. 당시 분양 관계자는 “화려한 장식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질리지만, 단아하고 은은한 공간은 오래 머물수록 정이 간다”고 설명했다.

보안 역시 강점으로 내세웠다. 당시 분양 관계자는 “어승재는 국내 타운하우스 가운데서도 최상급 보안 수준을 갖췄다”고 강조했다. 주요 수요층은 성북동 일대에 가족이나 친지가 이미 거주하고 있는 이들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분가 이후에도 가족과 가까운 거리에서 지내길 원하는 수요가 많았다는 설명이다. 강남에서 이주한 입주민들의 만족도가 높았다는 점도 분양 당시 소개됐다. 자연 속 환경을 누리면서도 광화문까지 10분 안팎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혔다.

현대家 3세부터 범LG가까지…재계 인사 ‘성북동 분가 1순위’

어승재는 유독 기업인들과 재벌 2·3세들에게 사랑받는 단지다. 강남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사생활 보호와 쾌적한 주거 환경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최적의 은신처가 된 것이다.

법원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정두선 현대퓨얼스 부사장은 2022년 이 단지 한 가구를 26억원에 매입해 거주 중이다. 해당 가구의 전 소유자는 범LG가인 구본완 LB휴넷 대표였다. 재벌가 3세 간 부동산 거래가 이뤄진 셈이다. 과거 거주자 가운데 잘 알려진 인물로는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이 있다. 그는 2004년 분양 당시 이곳을 수분양받아 약 10년간 거주한 뒤 2015년 21억원에 매도했다.

이외에도 동양그룹 일가 장녀 현정담 씨가 2007년 17억원에 매수해 현재 거주 중이며, 故 김대영 이지스자산운용 설립자의 딸 김애미 투썸플레이스 사외이사도 2020년 34억원에 매수한 뒤 거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승재가 세간에 알려진 건 정대선 전 HN Inc 사장과 전 아나운서 노현정 씨 부부 때문이다. 지난해 두 사람이 살던 어승재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 매각까지 이뤄져 화제가 됐었다. 정 전 사장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로, 현대비앤지스틸에서 경영 경험을 쌓은 뒤 2008년 정보통신업체 유씨테크를 인수하며 독자 행보에 나섰다. 이후 회사명을 현대BS&C로 바꿨지만, 2021년 현대차그룹과의 상표권 소송에서 패하며 사명을 HN Inc로 변경했다.

이후 건설과 IT를 축으로 사업 확장에 나섰고 스마트홈·블록체인·핀테크 등 신사업을 추진했지만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건설 경기 침체와 고금리까지 겹치면서 경영난이 심화됐고, 회사는 2023년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지난해 초 이들 부부가 거주 중이던 어승재 자택과 정주영 창업주로부터 상속받은 성북동 부동산도 경매 절차에 들어갔다. 어승재 해당 가구는 경매에서 21억8999만9990원에 낙찰됐다.

어승재 내부구조도. [지지옥션 제공]
어승재 내부구조도. [지지옥션 제공]

당시 경·공매 데이터 전문기업 지지옥션에 올라왔던 어승재 평면도에 따르면 이 주택은 거실, 주방, 침실 3개, 화장실 3개, 드레스룸, 세탁실, 발코니 등으로 구성된다. 호텔처럼 방마다 욕실이 달려있어 가족 내에서도 사생활을 지킬 수 있다.

시세차익보다 ‘프라이버시’… 가격 변동 적은 폐쇄적 시장

주목할 점은 가격이다. 수십억원, 100억~200억원대의 초고가주택 시장과 달리, 현재 시장에 나온 공급면적 507㎡(약 153평) 어승재 매물 호가는 29억원 수준이다. 2022년 26억원, 2020년 34억원에 거래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최근 수년 사이 가격 상승 폭은 크지 않은 편이다.

같은 성북동 인근 고급 주택 단지로 손꼽히는 ‘게이트힐즈 성북’, ‘성북 빌리지’, ‘성북동외교관사택단지’ 등도 각기 다른 가격이지만 거래 흐름이 비슷하다.

고급주택을 주로 중개하는 성북동 A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어승재 소유주들은 시세차익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 외부와 차단된 완벽한 보안과 자연 친화적인 정주 여건을 더 높게 평가한다”며 “광화문 등 도심 접근성이 뛰어나면서도 성북동 특유의 고즈넉함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이 단지의 대체 불가능한 가치”라고 설명했다.


quq@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