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는 AI 선두주자들
앤트로픽·오픈AI 연말·내년 상장앞둬
안전 명분 뒤엔 IPO 실적 맞추기 셈법
개발비 부담 낮추려 속도 조절론 주장
안전 규제 앞세워 후발주자 견제 분석
인공지능(AI) 개발 속도를 늦추자는 ‘속도조절론’이 투자업계를 강타하고 있다. 투자 심리가 흔들리고 주가가 요동친다.
표면적인 명분은 ‘보안’이고 ‘인류애’이다. 하지만 증권가 내 시각은 다르다. 왜 하필 지금 ‘속도조절론’이 부각되는가에 대한 해답과도 맞물려 있다.
기업공개(IPO)를 앞둔 프런티어 AI 기업들의 ‘돈 계산’이 주목되는 이유다. 천문학적인 학습비를 계속 쏟아부을 경우 수익성과 기업가치에 부담이 되고, 이는 IPO엔 큰 악재다. IPO 흥행을 위해서라도 개발 속도를 늦추고 수익성 확대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이런 속사정이 ‘속도조절론’으로 나오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관련기사 4면
속도조절론은 AI 인프라 투자가 끝없이 늘어날 것이라는 투자 내러티브에 반하는, 반도체주 비중이 큰 국내 증시엔 단기적으로 크게 흔들릴 요인일 수 있다. 하지만, 표면적 명분과 다른 속내까지 감안하면, 투자회의론의 신호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는 분석이다. 투자자 입장에선 ‘속도조절론’이 AI 투자에 대한 회의감이나 한계가 아닌, 주요 기업들의 숨겨진 ‘돈계산’ 전략이란 점을 참고할 수 있다. 미래 개발과 당장의 수익 사이에서 자금과 컴퓨팅 자원이 어떻게 재분배되는지가 ‘속도조절론’ 투자 전략에서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1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속도조절론에 불을 댕긴 건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프런티어 AI의 발전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자는 ‘프런티어 속도 조절(Pacing the Frontier)’을 제안했다. 경쟁자인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비롯해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 일론 머스크 xAI CEO도 잇따라 지지를 표했다.
아모데이 CEO가 내세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올여름부터 AI가 차세대 AI 개발에 직접 기여하는 재귀적 자기개선(RSI) 사이클이 업계 전반에서 나타나면서 모델 발전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AI가 다음 세대 AI 개발을 직접 돕기 시작하면 인간의 검증·통제 속도를 넘어 모델 성능이 가속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는 우려다. 아모데이 CEO는 3단계 방안을 제시했다. 외부 평가기관의 상시 접근을 허용하고 미국 등 민주주의 국가의 프런티어 기업들이 공통 안전 기준을 마련한 뒤, 궁극적으로 중국까지 포함한 국제 공조로 넓히자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인류의 안전을 위한 제안처럼 보인다. 하지만 증권가의 시선은 현실적인 이해관계로 향한다. 시장이 주목하는 건 이 같은 주장이 나온 시점이다.
프런티어 AI 기업의 수익구조는 일반 기업과 다르다. 오픈AI와 앤트로픽은 별도 현금창출원이 있는 빅테크와 달리 모델 성능과 판매가 사업의 핵심인 순수 AI 기업(Pure Player)이다.
이들에게 그래픽처리장치(GPU)는 미래 모델을 개발하는 설비인 동시에 당장 매출을 만드는 자산이다. 차세대 모델 학습에 GPU를 투입하면 그 기간에는 해당 자원을 고객 대상 추론 서비스에 활용할 수 없다. 학습을 늘려야 미래 모델의 성능이 향상되지만, 당장 벌어들이는 매출에는 기회비용이 생기는 구조다.
메리츠증권은 오픈AI의 GPT-6 아스트라(Astra)가 블랙웰(Blackwell)급 GPU 10만개 이상으로 학습됐다는 점을 토대로 핵심 사전학습 기간을 10주로 가정할 경우 기회비용이 12억1000만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연율로 환산하면 약 63억달러, 오픈AI 연간반복매출(ARR) 추정치 520억달러의 약 12%다.
다시 말해, 개발 경쟁 속도가 늦춰지면, 이처럼 학습에 대거 투입되는 GPU를 추론 서비스로 돌려 매출화할 여지가 그만큼 생길 수 있다.
IPO 일정까지 겹치면 속도 조절의 경제적 유인은 더 커진다. 일각에선 앤트로픽의 3분기 적자 전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주요 원인으로 대규모 AI 학습비가 지목되고 있다. 앤트로픽은 10월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조만간 증권신고서(S-1)를 공개할 예정이다. 상장을 앞두고 수익성을 입증해야 하는 시점에 학습비 부담이 커지는 건 기업가치에 큰 부담 요인이다.
오픈AI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년 이후 IPO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속도조절론이 불거지기 전인 지난 6월, 오픈AI가 기업가치가 기대치인 1조달러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상장 연기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높은 몸값을 인정받으려면 성장뿐 아니라 수익성을 보여줘야 한다.
IPO를 앞두고 수익성 증명에 나서야 할 이들 기업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그 중 하나가 학습에 쓰는 컴퓨팅 자원의 일부를 추론으로 돌리는 선택이다. 추론에 투입하는 GPU가 늘면 매출화할 수 있는 컴퓨팅 자원도 늘어난다. 또, 차세대 개발을 늦춰 모델 교체 주기가 길어지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개발한 기존 모델을 더 오래 판매할 수도 있다.
다만 한 기업만 속도를 늦추기는 어렵다. 앤트로픽이 학습을 줄이는 사이 오픈AI나 구글이 차세대 모델 개발을 밀어붙이면 기술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는 식이다. 반대로 주요 프런티어 기업들이 비슷한 수준으로 개발 속도를 낮춘다면 상대적인 경쟁 구도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학습에 투입했던 자원의 일부를 추론으로 돌릴 수 있다. 향후 IPO를 의식해야 하는 오픈AI도 수익성 측면에서는 비슷한 유인을 갖는다. 경쟁사들이 함께 움직인다는 신뢰가 형성된다면 공동 감속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속도조절론을 둘러싼 찬반 구도 역시 기업별 이해관계에 따라 엇갈린다. 공교롭게도 찬성하는 쪽은 대부분 AI 모델 개발사다.
AI 투자 확대의 직접적인 수혜를 누려온 하드웨어 기업 입장에서 속도조절론은 달갑지만은 않은 주장이다. 모델 개발 경쟁이 둔화될 경우 그동안 가파르게 늘어온 학습용 GPU와 데이터센터 투자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1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세일즈포스 연례행사 ‘드림포스’ 무대에 올라 “속도와 안전은 서로 상충되는 선택지가 아니며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공개 반박했다.
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CEO)도 15일(현지시간) 토론토에서 열린 ‘캐나다 투자 정상회의’ 패널 토론에서 “더 많은 용량을 더 빨리 구축할 수 있을수록 우리는 이를 더욱 민주화하고 모두가 이용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며 AI 구축이 지연되면 AI 기술이 ‘대기업들의 전유물’(the domain of large firms)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황수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보안은 명분이고, AI 성능에 편중된 기업가치 평가 잣대를 희석하고 학습 비용을 줄여 번 시간 안에 IPO 전후 수익 구간을 달성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며 “‘보안’이라는 비용 허들과 해외 AI 인프라 유출 통제는 후발주자의 추격을 늦추는 듀오폴리 강화 장치”라고 말했다.
김중한 삼성증권 연구원은 “프런티어 랩들이 표면적으로는 속도조절론에 동의하지만 현실화된 위협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져가려 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가정”이라며 “AI 테마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으나 펀더멘털이 아닌 단기 내러티브의 변화”라고 짚었다.
홍태화 기자
th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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