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에 어서 오세요(매슈 베이커 지음, 이수현 옮김, 문학동네)=칠십 세가 넘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권장하는 사회, 인간의 정신을 데이터로 전환해 육체 없이 컴퓨터 서버상에서만 살아가는 세상, 범죄자들을 구금하는 대신 범죄의 형량에 따라 기억의 일부를 삭제하는 세계가 만들어진다면? 현대사회의 첨예한 이슈를 역전된 세계를 통해 재치있게 보여준 매슈 베이커의 소설집.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제도나 관습, 기술을 소재로 현실 세계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단편 ‘의식’에선 세계인구가 110억 명을 넘어서면서 칠십 세가 넘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 요구된다. 주인공 가족은 권장 연령이 훨씬 넘었는데도 의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집안의 한 어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성차별의 역전을 그린 ‘유토피아의 어느 운 나쁜 날’은 극단적인 모권사회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국가의 엄격한 통제하에 시설에 갇힌 채 살아가는 남성들이 있다. ‘마마의 증언’에는 개인 당 사유물의 수가 적을수록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강박적으로 퍼진 사회를 그려낸다. 주인공 소녀는 가족들이 모두 소유욕에 시달리는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검소함과 자발적 기부를 통한 평등이라는 이상이 강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행복한 대가족’은 교육의 평등에 대한 역전을 그린 작품. 작가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의 갈등과 단절의 이면을 뒤집어 보여주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이승종 지음,아카넷)=분석철학의 선구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철학 뿐만 아니라 문학과 인문학, 자연철학 전반에 걸쳐있다. 그가 탐구의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게 언어의 의미, 이해, 규칙 따르기 등 일상의 기초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철학논고’‘철학적 탐구’는 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다. 이승종 교수는 사람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자연사적 사실을 통해 철학적 주제를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사람의 얼굴을 한 자연주의’ 로 해석한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핵심이 바로 자연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에 있다는 것이다. 자연사적 사실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토대에 해당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그 언어가 얽혀 있는 활동들 뿐 아니라 걷고, 먹고, 마시고, 노는 등의 비언어적 활동들을 포섭하는 것으로 보았다. 언어 사용을 통해 드러나는 언어의 의미를 사람의 자연사의 원초적 사실로 이해하는 이런 이승종 교수의 자연주의적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을 분석 철학, 일상 언어 철학의 관점에서 독해해온 기존의 통념을 넘어선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의미는 언어의 쓰임에서 나오는데, 언어의 쓰임은 소통과 이해를 동반한다. 객관적 3인칭 대상인 자연과 타자는 이 과정에서 2인칭으로 나와 연결된다. 이런 사람의 삶 속의 행위와 활동 속에서만 언어는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책은 비트겐슈타인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저자의 역작으로 우리 학계에 부족한 독창적 해석의 부족함을 메운다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땅은 잘못 없다(신민재 지음,집)=숭례문 옆 HM빌딩은 지상 10층의 얇고 모서리가 뾰족한 빌딩으로 행인의 시선을 끈다. 왜 그런 모양이 됐는지를 알려면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그 곳은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만든 남지,즉 연못이었다. 그 땅은 1907년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의 방문을 앞두고 매립된다. 그리고 대형건물 일화빌딩이 들어서고 해방 후 1968년까지 사용되다가 도로 확장으로 철거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 1호선 공사로 파헤쳐지고 마침내 건물을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좁고 긴 땅으로 용케 살아남았다. “지난 100년간 있었던 다양하고 폭력적인 토목공사의 상처”를 품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 신민재는 도시에 기이한 형태로 살아가는 얇은 집 60여곳을 찾아 그렇게 된 연유를 들려준다. 그 중에는 경리단길에 있는 주차구획보다 좁은 유리 건물도 있다. 육군 중앙경리단의 높은 담장 뒤에 자리한 이 집은 2015년 지어졌다. 경리단길이 뜨면서 좁은 땅이나마 활용하고자 지은 것이다. 이 땅은 육군 중앙경리단이 이태원동 518번지 일대에 자리잡으면서 영내로 포함되지 못해 생긴 조각땅이다. 저자는 도시의 급속한 변화에 휩쓸려 침식된 조각난 땅의 모양과 그 위에 지은 건물의 만듦새에 애틋한 시선을 보낸다. 변화 과정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항공사진과 기록사진, 지적도, 직접 찍은 사진과 건물 스케치, 위치도 등이 땅과 건물, 도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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