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아트센터, ‘최태지의 발레 오픈 리허설’
오는 8일엔 전 국립발레단 단원 윤혜진
11월엔 차진엽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삶은 춤이 된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무대 위에선 미처 몰랐던 무대 밖 순간들이 있다. 수십 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치열한 노력, 얽히고설킨 인간적 서사, 서로를 성장하게 한 신뢰와 존중이 층층이 쌓여있다. 한국 발레계의 거목인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과 두 제자 윤혜진 차진엽이 공유한 30여년의 긴 세월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완벽한 결과물만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것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뎌낸 무용수들의 삶과 백스테이지 이야기를 아카이브처럼 담아내고 싶었어요.” (최태지)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최태지의 발레 오픈 리허설’의 기획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 무대의 진행자이자 예술감독으로 공연을 이끈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발레 오픈 리허설’은 예술가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그들의 춤이 더해진 공연이다. 지난해엔 발레리나 김주원을 비롯해 강경호 이은원 이현준이 출연했다. 최 감독은 “진짜 자기 집에서 대화하듯 거짓 없이 진심을 털어놓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올해의 ‘주인공’은 국립발레단 전 단원이자 세계적인 안무 거장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이끄는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에 몸담았던 윤혜진과 ‘무용계의 스타’이자 현대무용계를 이끄는 거장 반열에 오른 안무가 차진엽이다.
운명을 바꾼 스승의 지름길… “너를 다시 무대로 데리고 가겠다”
세 사람 관계의 구심점엔 최태지 감독의 혜안과 애정이 자리한다.
최 감독과 윤혜진의 인연은 국립발레단 시절 깊어졌다. 최 감독은 당시의 윤혜진을 떠올리며 “국내에 캐릭터 연기를 할 수 있는 발레리나가 드문데 (윤) 혜진이는 국립발레단 시절에도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며 “‘로미오와 줄리엣’의 엄마 역할, ‘지젤’의 미르타 등 무대에 서면 시선을 가져가는 무용수였다”고 돌아봤다.
당시 윤혜진을 주역으로 데뷔시킨 것도,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 오디션을 권유해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품으로 보낸 것도 최 감독이었다. 1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윤혜진이 무대로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스승의 한마디가 있었서였다.
“혜진아, 너 무대 안 서고 싶어?”
윤혜진은 공연장에서 우연히 만난 최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배우 엄태웅의 아내이자 인플루언서로 대중에게 노출된 윤혜진에게 그간 공연 제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타 파워’가 절실한 때에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을 알린 윤혜진은 무용계에서도 탐나는 출연자였다. 많은 러브콜에도 ‘철벽’ 같은 거절로 일관했던 윤혜진이 다시 토슈즈를 신는 것은 최 감독 때문이었다. 그는 “사실 처음엔 토크만 하기로 했는데 단장님께서 점점 하나씩 추가해 춤도 추라고 하셨다”며 “단장님은 제게 단순한 감독님이 아니라 부모님 상가에도 찾아와 주실 만큼 각별한 존재”라고 했다.
“너를 무조건 다시 무대로 데리고 가 발레리나 윤혜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말씀에 무서움도 잊고 응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가로 자리한 차진엽과 최 감독의 인연은 3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최 감독은 “중학교 때부터 발레를 가르쳤던 아기 같은 제자였다”며 웃었다.
중학생 차진엽에게 직접 발레를 가르쳤던 최 감독은 그가 현대무용의 길을 간 뒤에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차진엽에게 최태지는 ‘춤의 근간’을 다진 스승이자 근원적 존경의 대상이었다. 차진엽은 고등학교 시절 당대 가장 권위 있던 동아무용콩쿠르에 참가, 현대 무용 부문 금상을 수상했다. 당시 그는 “최태지 선생님께 배워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소감을 건넸을 정도. 이후 영국 유학 시절 최 감독은 제자에게 국립발레단 ‘왕자호동’의 안무 참여를 제안하며 무용수 차진엽의 삶을 창작자의 길로 이끌었다.
최 감독은 “조용히 연습만 하던 아이가 현대무용계의 독보적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으로 성장한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며“어떻게 이런 카리스마를 가지게 됐는지 저 역시 너무 궁금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국립발레단 문화학교 1기’의 재회… 서로의 궤적을 비추는 거울
윤혜진과 차진엽은 무용계의 소문난 절친이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 ‘국립발레단 문화학교 1기’ 동기이자 같은 학원 선후배로 춤을 시작한 30년 지기다.
윤혜진 기억 속 차진엽은 ‘예쁘고 머리 좋고 안무를 너무 빨리 외우는 우등생 언니’였다. 윤혜진은 “어릴 때부터 언니는 연습벌레였다. 땀 흘리며 연습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 동경의 대상이었다”며 “이후 현대무용으로 영역을 넓혀 삶과 연결된 원초적 움직임을 안무하는 언니를 보며 ‘함부로 탐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진짜 예술가’라는 깊은 존경을 품게 됐다”고 했다.
차진엽의 눈에 비친 윤혜진은 ‘클래식 발레’의 틀을 깨는 와일드하고 스타일리시한 무용수였다. 그는 “혜진 씨는 화려한 스타성 뒤에 누구보다 솔직하고 진심 어린 언행일치를 보여주는 사람”이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일 훈련하며 다리 라인을 만들어내는 그의 장인정신은 컨템포러리 무용을 하는 내게도 깊은 자극과 반성을 준다”고 했다.
세 사람의 오랜 인연은 무대 위에서 다시 써 내려간다. 첫 타자는 윤혜진(8일, 강동아트센터)이다. 그는 40대에 다시 토슈즈를 신으며 겪는 신체적 통증과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차진엽(11월, 강동아트센터)은 춤과 몸의 본질을 찾는 작업인 ‘원형하는 몸’ 시리즈를 통해 AI 시대에도 ‘인간의 몸이 통과하는 지난한 시간’의 가치를 짚어낸다. 두 사람의 작업은 모두 30년간 서로의 삶을 목격해 온 연대에서 비롯된다.
윤혜진은 “무대를 떠나 있어도 그간 발레 바(bar)를 놓은 적이 없는데 오랜만에 토슈즈를 신은 첫날 ‘망했다, 괜히 하겠다고 했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좌절했다”며 “현역 시절의 몸 라인과 근육을 되찾기 위해 하루 한 시간씩 PT, 발레, 러닝을 병행했다”고 말했다.
무대에선 윤혜진을 상징하는 작품과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마이요 안무 ‘도베 라 루나’를 선보인다. 이 무대를 위해 몬테카를로 발레단 수석 무용수 안재용이 날아온다. 윤혜진은 “매일 토슈즈를 신고 연습하면서 거울 속에 익숙했던 다리 라인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을 때 감격스러웠다”며 “나이 50이 다 돼 왜 이러고 있나 싶다가도 음악이 나오면 움직이게 되고, 무용수로서 무대에 서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몸을 만들었다”고 했다.
차지엽의 무대는 컨템포러리 예술을 이어가는 그의 뿌리인 “발레를 되짚고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 속에서 우리가 잃지 않고 회복해야 할 가치가 있다. 공연은 쇼츠(Shorts)처럼 빠르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머물며 펼쳐지는 시간을 함께 통과하고 견디는 과정”이라며 “관객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매일 자기 몸을 돌보고 지루한 과정을 견뎌내는 오픈 리허설을 보며 감상을 넘어 ‘나는 내 삶과 몸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는가’를 스스로 알아채고 깊어지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는 마음을 들려줬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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