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고전 ‘바냐 아저씨’가 두 무대에

‘비극 혹은 희극’ 다양한 해석에 재연 많아

인간의 가치 위협받는 AI 시대에도 딱 맞아

이서진·고아성 vs 조성하·심은경 비교 재미

연극 ‘바냐 삼촌’의 이서진 고아성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바냐 삼촌’의 이서진 고아성 [LG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형이 뭘 알아, 이혼했으면서!” (이서진) vs “바람난 여자한테 전 재산 다 바치고선 그딴 기타 하나 남아서 좋아요?” (조성하)

체호프 작품이 한국말로 옮겨지자,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대사로 완성됐다. ‘바냐와 반야’, ‘삼촌과 아재’의 차이만큼이나 전례 없는 ‘미학적 충돌’이다.

지금 국내 연극계는 같은 원작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본 두 편의 연극으로 인해 연일 뜨겁다. LG아트센터가 제작하고 배우 이서진·고아성이 출격한 ‘바냐 삼촌’과 국립극단과 조성하·심은경이 만난 ‘반야 아재’ 이야기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가 각기 다른 프로덕션에서 다른 연출가, 다른 배우들의 조합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둘은 완전히 상반된 ‘연극적 행로’를 보여준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은 시기 동일한 원작을 무대에 올리는 시도는 나름의 ‘문화적 동시대성’의 발현이다.

국립극단 ‘반야 아재’의 연출을 맡은 조광화는 “평생을 걸쳐 이어온 노동과 헌신이 수포로 돌아갈 때 다가오는 실존적 절망과 환멸은 기술의 풍요와 AI(인공지능) 알고리즘의 지배로 인간의 가치가 위협받고 인간이 알던 질서가 무너져 버리는 지금 시대에 깊은 위로와 공감을 안긴다”고 말했다.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가 뭐길래

‘바냐 아저씨’가 세상에 나온 건 1897년. 체호프가 1889년에 집필한 자신의 초기 희곡 ‘숲의 정령’을 긴 세월 다듬고 고쳐 내놓은 4막 희곡이다.

서사의 줄기는 명징하다. 마흔일곱 살의 주인공 바냐와 조카 소냐는 러시아의 외진 시골 영지에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보낸다. 죽은 여동생의 남편이자 소냐의 아버지인 세레브랴코프 교수의 학문적 성취를 위해 이들은 뒷바라지를 자처했다. 그가 ‘인생 업적’을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바냐는 낮이면 일을 하고, 밤이면 번역 작업을 도왔다.

세레브랴코프 교수는 바냐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젊고 매혹적인 데다 한때 바냐가 마음을 품었던 여자 엘레나와 재혼을 한 것. 여기에 지극히 속물인 데다, 지루하고 오만하다. 지식인의 면모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빈껍데기였다. 바냐가 평생을 바친 헌신과 동경은 뒤늦은 후회와 자조적 환멸로 변한다. 급기야 교수가 자기들 삶의 터전인 영지를 처분하겠다고 선언하자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분노와 슬픔이 파괴적인 광기와 자살 기도라는 극단적인 폭발로 발현한다.

전문가들은 ‘바냐 아저씨’의 위대한 성취를 “전통적인 영웅주의 서사나 정형화된 비극의 문법을 거부했다”는 데에서 찾는다.

국립극단 ‘반야 아재’를 통해 첫 연극에 도전한 배우 심은경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 ‘반야 아재’를 통해 첫 연극에 도전한 배우 심은경 [국립극단 제공]

체호프는 일상의 권태, 짝사랑의 소동, 무의미하고 사소한 대화들을 사실주의 극작술로 포착했다. 시대와 배경은 낯설지라도, 이 위대한 고전은 놀랍도록 동시대적이다. 130년 전 이야기는 가혹한 산림 파괴와 자원의 황폐화를 아파하며 미래 세대의 평화를 선구적으로 웅변한다. ‘바냐 아저씨’ 속 등장인물인 의사 아스트로프를 통해서다. ‘숲의 정령’ 속 주인공인 흐루쇼프를 원형으로 한다. 체호프 역시 의사 출신이었다.

체호프는 이 작품을 ‘희극’이라 불렀다. 삶의 굴레에 우스꽝스럽고 씁쓸한 코미디적 웃음이 얽혀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었다. 정작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이 작품을 초연한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는 작품을 무겁고 비장한 ‘비극’으로 풀어냈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웠고, 이 ‘불화’는 연극사에서 가장 유명한 오해로 남아있다. 이 역시 작품의 ‘정직한 초상’이다.

연극계 관계자는 “해석상의 괴리와 희비극의 이중적 아이러니는 오늘날까지도 연출가들에게 비극성과 희극성 사이에서 인간의 서툶을 어떻게 포착해 낼 것인지에 대한 예술적 도전을 던진다”고 말했다.

‘바냐 아저씨’의 무대에선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구질구질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군상극’이다. 은퇴한 교수 세레브랴코프가 어린 아내 엘레나를 데리고 시골 영지로 들어오며 벌어지는 한 계절 동안의 소동으로 바냐와 소냐의 안온했던 일상이 흔들린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바냐는 교수를 향해 두 번이나 총을 쏜다. 그러나 두 발 모두 빗나가고 만다.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이 소동은 마치 우리 인생의 복사판처럼 보인다.

손상규가 연출한 연극 ‘바냐 삼촌’ [LG아트센터 제공]
손상규가 연출한 연극 ‘바냐 삼촌’ [LG아트센터 제공]

이 ‘무위(無爲)의 구조’가 인간의 가장 깊은 층위를 건드린다. ‘바냐 아저씨’에서 사건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바냐 삼촌’에서 교수 역할을 맡은 배우 김수현은 “체호프의 사건은 사람의 감정과 욕망 그 자체”라고 했다. 이 희곡 안에서 드라마는 외적 행동이 아니라 억눌린 내면의 미동에서 발원한다. 그렇기에 ‘바냐 아저씨’는 연출가에게도, 배우에게도, 번역가에게도 끝없는 해석의 문을 열어둔다.

초연을 연출한 스타니슬랍스키가 남긴 정통 사실주의는 다양한 ‘바냐 아저씨’로 이어졌다. 세계적인 거장 레프 도진의 ‘바냐 아저씨’는 마지막 장면에서 건초더미를 통해 인간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형상화했다. 현대 해외 무대는 미니멀리즘 각색부터 앤드루 스콧의 1인 8역 파격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해체의 역사였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역시 이 연장선에 있다.

한국의 창작자들은 체호프가 묘사한 러시아 몰락기 지식인들의 무력감과 삶의 환멸에서, 질곡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과 한국인이 가진 ‘한(恨)’의 서사라는 정서적 유사성을 포착했다. 한국 연극에서 체호프는 1979년 극단 제3무대의 공연에서 시작, 1980년 극단76의 공연에서 중요한 방점을 찍는다.

가장 주목받았던 국내 번안 작품은 김은성 작가의 ‘순우 삼촌’(2010)이다. 작품에선 러시아 농가를 1970년대 강남 개발 직전의 ‘잠실섬’으로 옮겨왔다. 평생 형을 뒷바라지하다 터전을 수탈당한 기층민의 허무를 국가적 개발 독재의 폭력성과 절묘하게 밀착했다. 고전을 한국 근현대사 속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사례다.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왜 다시 체호프의 ‘바냐’인가?

지금도 여전히 체호프의 ‘바냐’가 무대에 또 소환되는 이유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사람들과 AI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정서가 묘하게 맞닿아 있어서다.

우선 국립극장에 올라간 ‘반야 아재’를 번안한 조광화 연출은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라는 작품을 보고 작업의 실마리를 얻었다. 그는 “평생을 바친 그 시간이 무용지물이 돼버린 충격과 자기 인생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듯한 실존적 환멸, 그 무력감의 심연에서 체호프의 바냐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조 연출가의 말처럼 ‘바냐 아저씨’는 특정한 시대의 패배를 다루지 않는다. 어느 시대든 있어 왔던 ‘노력이 무용(無用)해지는 감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것은 19세기 러시아의 외진 영지에도,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정미소에도, AI의 등장으로 우리가 알던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2026년 서울에도 똑같이 살아 숨 쉰다.

조 연출가는 “AI나 전쟁 위기, 기후 위기로 우리가 알던 지식과 질서들이 다 무너져 버리는 것 같고, 내 노력이 아무도 인정 못 받는 이 시대와 바냐의 시대가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극 ‘바냐 삼촌’의 고아성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바냐 삼촌’의 고아성 [LG아트센터 제공]

이와 함께 AI와 급격한 기술 발전이 지배하는 ‘오차 없는 시대’에 대한 피로감 역시 ‘바냐’를 다시 무대로 소환케 하는 원동력이다. 두 편의 ‘바냐 아저씨’를 만난 공연계 관계자들은 “완벽을 강요하는 질서 속에서 현대인들은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함을 확인하고 실존적 무력감을 위로받고자 갈망한다”고 입을 모은다.

즉 평생을 바친 노력과 고유한 가치가 순식간에 휘발되는 현대 사회의 속성은 헌신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마흔일곱 살 바냐의 환멸과 심리적 평행선을 이룬다. 체호프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일상의 권태와 중년의 불안, 엇갈리는 욕망 등 숨기고 싶은 결점과 미숙함을 탈선악적인 연민의 시선으로 복원한다.

체호프의 문법은 삶 안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삶의 무게와 끊임없이 맞서본 이들에게, 혹은 그 모든 시간들을 통과해 온 시기의 사람들에게 온전히 작동한다. 삶의 노력이 쌓일수록, 역설적으로 그 노력이 허망하게 헛돌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을 눈물겹게 알아차린 사람이라면 바냐의 절망에 공명할 수 있다.

조성하는 “바냐처럼 사는 분들이 세상에 많이 있는 것 같다. 내 가족 중에 한두 사람은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자기 삶의 궤적 안에서 적어도 한 명의 바냐를 알고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바냐일지 모른다는 은밀한 자각도 잠재해 있다.

체호프는 끝내 달콤한 해법을 주지 않는다. 한바탕 소동이 있었지만, 교수 부부는 떠나고 남겨진 이들은 원래의 지루한 혹은 평온한 자리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결말은 이 작품이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는 이유다. 작품에선 ‘같이 겪어내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으로 남는다. 체호프가 1897년에 발견한 것은 날카로운 해법이 아니라 견뎌내는 이들을 위한 ‘동행의 언어’인 셈이다.

‘바냐 아저씨’는 단지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존재의 뿌리를 위협당하는 우리 자신의 쓸쓸하고 아름다운 초상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고전이 여전히 유효한 예술적 해답으로 무대에 존재하는 이유다.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두 개의 제목, 두 개의 세계관…2026년 동시대 미학 격돌

#1. 텅 빈 무대, 대리석으로 치장한 차갑고 높은 무채색의 벽이 세워졌다. 층고 높은 공간에 들어선 거대한 수직의 벽 아래로 기다란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 넓은 공간에 드문드문 흩어져 앉은 사람들 사이로 일상이 증발한다. 빛은 길게 드리우고, 이들 사이로 미세한 공기가 떠돈다. 극단적 미니멀리즘의 무대, 장식은 지워졌지만 도리어 무대는 꽉 채워졌다. LG아트센터의 ‘반야 삼촌’이다.

#2. 회전하는 누마루, 잔잔한 연못 위로 징검다리가 놓인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무대가 돌며 인물들은 객석 가까이로 오간다. ‘투두둑 툭툭’, 쏴아아아.‘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우산을 쓴 배우들은 무대를 걷고 뛴다. 담벼락 뒤로 몸을 감추고 누마루에 앉아 마당의 누군가와 대화하는 이곳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충북 영동군 황간면의 조선집이다. 국립극단의 ‘반야 아재’다.

같은 체호프지만, 무대는 완전히 다르다. 한쪽은 완전히 비워냈고, 다른 쪽은 켜켜이 쌓아 올렸다. ‘바냐 삼촌’의 무대를 맡은 김종석 디자이너는 회화적 여백을 구현해 관객들의 몰입을 고도로 단순화했고, 인물들의 내면 변화는 사실적인 시각 효과가 아니라 무대 전반을 가르는 직사광과 간접광의 날카로운 조명 대비로 비췄다.

국립극단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이태섭 무대 디자이너의 ‘반야 아재’는 해오름극장의 큰 무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체호프의 작품은 “가까운 곳에서 배우를 관찰하는 작품”이라며 “연극 무대는 영화 같은 클로즈업이 불가능하지만, 회전 누마루를 통해 카메라의 앵글이 바뀌듯 관객들의 시선을 이동시키고 거리를 좁히고 넓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무대는 “배우가 잘 보여야 한다”는 이태섭 디자이너의 철학, 사실주의를 넘어 자연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투영된 무대다.

조광화 연출가는 이 무대에서 “가장 비싼 장치는 비 내리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확보한 물과 물을 담는 장비, 자동 회전 누마루”라고 귀띔했다. 국립극단에선 애초 자동 회전 모터를 다는 것이 제작비가 많이 들어 수작업도 구상했다.

무대만큼이나 직관적인 차이점은 제목이다. 두 작품의 배경과 색깔은 제목에서부터 갈린다.

‘삼촌’은 현대 표준어다. 젠더 중립적이고, 계층 중립적인 호칭이다. 친근하고 보편적인 어감엔 시대를 초월한 원작의 보편성을 그대로 가져오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바냐 삼촌’의 손상규 연출가는 “어릴 적부터 이 작품을 ‘바냐 삼촌’으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반면 ‘아재’는 경상도 방언으로, 낡고 촌스러운 중년 남성을 낮게 보는 의미처럼 쓰인다. 여기에 영동의 반야사와 불교적 의미인 반야(般若·지혜)를 함께 포개는 작명으로 중의성을 담았다.

조성하 심은경의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조성하 심은경의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바냐’와 ‘반야’는 발음 하나 차이로 공간적·시간적 이동 전체를 압축한다. ‘바냐 삼촌’은 이름도, 배경도 러시아 원작을 그대로 둔다. 대신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배우의 몸과 감각으로 130년 된 텍스트를 관통, 지금 우리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반야’는 다르다. 공간 자체를 옮긴다. 러시아 영지는 1939년 정미소가 됐고, 이반(Ivan)에서 온 바냐는 박이보(朴二甫)가 됐다.

이서진의 ‘건조한 냉소’ vs 조성하의 ‘비장한 상실’

두 바냐가 뿜는 정서적 에너지 역시 완전히 다르다. 여기에 배우들의 정서적 앙상블까지 다른 경로를 개척하자, 팽팽한 미학적 줄다리기를 하게 됐다.

이서진의 ‘바냐 삼촌’은 생활 연기 그 자체다. 기존 정극의 낭독 방식이나 다듬어진 연극적 정형성을 벗어난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이 익숙하게 봐온 이서진이 바냐가 됐다. 그의 냉소와 빈정거림, 무심함과 악의 없는 유머가 바냐로 투영, 명실상부 ‘2026년의 바냐’로 존재했다.

손상규 연출가는 그에게 ‘일상적인 말투’는 물론 ‘있는 그대로의 이서진’을 보존할 것을 당부했다. 손 연출의 방향성은 체호프의 본래 의도인 ‘희극성’에 충실하다. 무대에선 이서진인지, 바냐인지 모를 정도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이서진의 지문이 강하게 묻어 ‘웃음 유발’ 장면이 많다. 무심히 툭 던지는 말투와 이서진 특유의 리듬감이 극과 현실을 오가며 웃음을 준다.

연극 ‘바냐 삼촌’의 이서진 고아성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바냐 삼촌’의 이서진 고아성 [LG아트센터 제공]

이서진의 냉소는 고아성의 활동적이고 단단한 소냐와 매끄러운 앙상블을 이룬다. 고아성의 소냐는 원작의 가련함을 지웠다. 무대를 분주히 뛰어다니며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소녀’로서 마지막 순간 이서진의 눈물을 어루만진다. 고아성이 나직하게 전하는 “우리 살아봐야지, 삼촌”이라는 대사는 헛된 소동이 지나간 후 다시 찾아온 일상들을 감내하는 평온하고 포근한 달래기다.

손상규 연출가는 마지막 소냐의 대사를 “인생을 돌아보면 열심히 살았고 고군분투했고, 실수도 하고 망치기도 했고 갈등도 했지만 아주 멀리서 보면 괜찮을 거다. 어떤 순간엔 내가 나를 관대하게 보고 어떤 순간엔 편안해질 거야, 그러니까 ‘지금 괜찮아, 뭘 해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국립극단의 조성하는 TV와 스크린을 가로지르며 응축된 페이소스를 무대 위에 처절하게 터뜨린다. 1939년 일제의 수탈과 전시 체제로 편입되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조광화 연출가는 “지금 시대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조선인들의 감각과 닮았다”며 “500년 역사를 이어 온 나라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자기가 평생에 쓰고 다듬었던 단어와 문장들, 언어들을 쓸 수 없게 된 시대. 청년들이 어디로 나아가려고 하는 바람이 사라졌고, 나이 든 세대들은 자기가 노력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돼버린 그런 시대”라고 말했다.

연극 ‘바냐 삼촌’의 이서진 고아성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바냐 삼촌’의 이서진 고아성 [LG아트센터 제공]

조성하의 이보(박이보)는 식민지의 척박한 땅에서 정미소를 지키며 형부의 명성을 숭배했으나, 그것이 기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무함에 폭발적인 울분과 비통한 광기를 단계별로 축적해 나간다.

심은경이 연기하는 조카 은희는 고아성의 소냐보다 완고하고 단단한 영혼을 가졌다. 장대비 속에서 절망을 온몸으로 대면하며 삼촌의 상실감을 깊이 안아준다. 심은경의 은희가 건네는 엔딩의 대사는 달콤한 위로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일상의 허무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교수 내외는 정미소의 일상을 뒤흔드나, 그들이 떠나면 더 폭압적인 식민 통치가 온다는 절망, 하지만 그 시대도 저물고 있다는 흐릿한 희망이 공존한다. 그 상황은 “힘겨운 낮과 기나긴 밤들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하루하루 살아가요. 업보라 여기고 가시밭길을 걸어가요”라는 서늘한 독백으로 남는다.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간결한 현대화 ‘바냐 삼촌’ vs 친절한 설명 ‘반야 아재’

두 무대는 작품의 연출 방식과 구성도 완전히 다르다. ‘바냐 삼촌’이 세련된 현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간결하게 만들었다면, ‘반야 아재’는 시공간의 이동으로 보다 많은 설명이 개입됐다.

국립극단의 ‘반야 아재’가 거둔 가장 큰 성취는 체호프를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 속으로 과감하게 이식했다는 점이다.

조광화 연출이 만든 식민지 조선의 풍경은 체호프가 묘사한 몰락의 정서와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비가 쏟아지고, 정미소가 돌아가고, 곡물이 폭포처럼 무너져 내리는 무대는 해오름극장이라는 대극장이기에 가능한 압도적 장관을 이룬다.

다만 이 과정에서 체호프의 복합성과 모호함이 다소 선명한 역사적 해석으로 수렴되는 지점도 있다. 원작 속 갈등은 인간의 허영과 노동, 도시와 지방, 지식과 삶이 뒤얽힌 다층적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반야 아재’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전면에 배치하면서 생산자와 지식인, 현실과 이상이라는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연극 ‘바냐 삼촌’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바냐 삼촌’ [LG아트센터 제공]

덕분에 관객의 입장에선 작품의 시대적 의미를 쉽게 포착할 수 있지만, 체호프가 남겨놓은 해석의 여백은 줄어든다.

인물들의 재해석은 흥미롭지만 시대의 치환으로 비롯된 계층과 젠더의 이분법이 두드러지는 점은 아쉽게 다가온다. 인물들의 대화에서 계층, 나이,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극존칭은 계급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대의 반영이겠으나, 역사성에 치우친 도식적인 접근은 인물들의 다층적인 관계를 계급과 성별이라는 평면적인 틀 안에 가둔다. 이러한 한계는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심은경의 은희(원작 소냐)는 내내 말리는 존재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현실을 지탱하는 강인한 생존자인 은희는 무너진 남성들을 품고 위로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식민지 시대 여성들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장점인 동시에, 지나치게 성스러운 숭고함으로 미화하는 구시대적 여성관의 투영이다. 남성적 붕괴를 수습하는 여성의 헌신이라는 닳고 닳은 극적 구도를 보여준다.

오영란(원작 엘레나, 교수 새 부인) 역시 마찬가지다. 인물 안에 깃든 무료함과 답답함을 섬세하게 표현하지만, 극은 이 인물을 남성들의 욕망과 환상을 비추는 거울로 활용한다. 재혼한 아내임에도 그의 앞에서 전 부인의 미담을 강조하는 대목은 무례하게 다가왔다. 비단 여성성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오영란의 “이 집 남자들 왜 저래”, 유모의 “수탉들은 원래 저렇게 싸운다”는 대사는 인물들의 한계를 성별의 굴레로 납작하게 가두며, 체호프가 포착하려 했던 인간 본연의 씁쓸한 소동을 단순한 촌극으로 전락시킨다.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연극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반면 ‘바냐삼촌’은 역사 대신 인간을, 맥락 대신 감정을 강조하며 체호프를 현재형으로 불러온다.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체호프를 오늘의 관객 곁으로 끌어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러시아 귀족 몰락기의 지식인보다 서울 어딘가에서 실제로 만날 법한 중년 남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 친밀함은 공연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동시에 작품의 양면성이기도 하다. 체호프의 바냐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면서도 깊은 절망을 품고 있다. 웃음과 비극이 한 몸처럼 공존한다. 이서진의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탁월하지만, 때로는 인물 안에 숨어 있는 절박함과 파괴적인 분노가 상대적으로 옅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바냐의 절망이 한 사람의 생을 뒤흔드는 실존적 절망이 아닌 도련님의 사소한 투정으로 보일 정도다.

고아성의 소냐 역시 비슷한 지점이 있다. 기존의 수동적이고 희생적인 소냐에서 벗어나 활기와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무대를 누비며 사람들을 돌보고 감정을 수습하는 모습은 매력적이나, 소냐의 마지막 대사는 원작의 깊은 위로이기보다 현대적인 다정한 정서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두 편의 ‘바냐’의 성취는 분명하다. 이 작품은 체호프를 어렵고 무거운 고전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되살려낸다는 점에 있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삶의 환멸과 붕괴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비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체호프의 메시지를 복원해 냈다는 점에서 이번 각축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며 “실존의 뿌리를 위협당하며 무가치함과 싸우는 현대인에게 존재의 소명을 차갑고도 뜨겁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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