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기업 대신 민간기업에 인프라 맡겨…‘재벌 육성 전략’

베트남 하노이에서 베트남 대기업 빈그룹이 개발 중인 13만5000천석 규모의 축구 경기장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로이터]
베트남 하노이에서 베트남 대기업 빈그룹이 개발 중인 13만5000천석 규모의 축구 경기장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로이터]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대규모 개발 현장에서 베트남 최대 기업집단 빈그룹(Vingroup)이 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기초 공사를 벌이고 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민간기업이 대형 인프라 사업을 주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세계 무역질서가 흔들리는 가운데, 수출과 외국인직접투자(FDI)에 지나치게 기대온 경제구조를 바꿔보겠다는 베트남 정부의 승부수다.

1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 공사 현장 주변은 이미 빈그룹 왕국이나 다름없다. 계열사가 지은 고층 아파트와 고급 빌라가 늘어서 있고, 도로에는 빈그룹 계열사가 만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가득하다. 여기에 총 56억달러 규모의 고속철도 사업까지 빈그룹이 따냈다. 하노이와 관광지 하롱베이를 잇는 이 노선(총연장 120km)이 완공되면 2시간 30분 걸리던 이동시간이 30분으로 확 줄어들 전망이다.

사실 이런 대형 사업은 원래 국영기업의 몫이었다. 그런데 베트남 정부가 판을 바꿨다. 빈그룹처럼 여러 사업을 거느린 대형 기업집단을 키워, 앞으로의 경제성장을 이끌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전략을 진두지휘하는 인물이 또 럼 공산당 서기장이다. 수십 년 만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지도자로 평가받는 그는 대대적인 관료제·경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재벌’ 모델을 참고해 자국 대표 기업을 육성하려는 포부다. 대형 프로젝트를 맡길 때 이들 기업을 우선 고려하고, 토지와 자금도 쉽게 조달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방식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응우옌 바 훙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두고 “국내 기업들의 역량이 경제의 야심과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정부 스스로 인정한 셈”이라고 짚었다.

베트남 정부가 지난해 민간 부문 육성을 위해 내놓은 ‘결의안 68호’는 2030년까지 글로벌 가치사슬에 참여할 수 있는 대기업을 최소 20곳 키우고, 민간기업 수는 지금의 두 배인 200만개로 늘린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국영기업과 외국기업에 밀려 ‘조연’에 머물렀던 민간 부문을 아예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격상시키겠다는 선언이다.

훙 이코노미스트는 “이 결의안이 민간 부문의 신뢰를 높여 인프라 같은 장기 자산에 투자를 시작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라며 “한국의 재벌 모델에서 상당 부분 영감을 받은 정책”이라고 말했다.

FT는 한국의 재벌 시스템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를 이끈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전했다. 정부가 각종 인센티브와 저리 자금,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해 가족 소유의 다각화된 대기업집단 성장을 장려했다. 이들 기업집단을 수출 목표를 부여받았고, 한국 경제를 탈바꿈시켰다. 반면 독과점을 형성하고 중소기업의 입지를 좁혔다는 부작용도 있다.

베트남 프놈펜 자치항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AFP]
베트남 프놈펜 자치항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AFP]

베트남이 자국을 대표할 대기업 육성에 나선 것은 그동안 베트남 경제가 외국인 투자가 이끄는 고속성장에 크게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미·중 갈등 속에서 제조업체들이 관세를 피해 중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생산시설을 옮기며 톡톡히 재미를 봤다. 지금도 미국은 베트남 전체 수출의 약 3분의 1을 사들이는 최대 시장이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미국의 관세 정책 변화 하나에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영기업에 대한 기대도 예전만 못하다. 그동안 베트남 성장의 한 축을 맡아온 국영기업들이지만, 일부는 막대한 부채를 떠안거나 부패 의혹에 휘말리며 신뢰에 금이 갔다.

HSC증권의 타일러 응우옌 수석 시장전략가는 “새 결의안은 국내 민간기업이 외국기업·국영기업과 더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것”이라며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걸어온 발전 경로와 닮은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이미 빈그룹은 고속철도 노선 최소 2곳의 건설을 따냈고, 하노이 도시철도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업체 쯔엉하이그룹(Thaco)도 베트남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670억달러(약 94조원) 규모의 초대형 고속철도 사업 입찰에 뛰어들었다.

전문가들은 철강업체 호아팟그룹과 IT기업 FPT도 앞으로 ‘베트남판 재벌’로 성장할 후보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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