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시장, 42년째 독점

계약 관련 잡음 이어져

“관리 체계 재점검 필요”

‘세계 헌혈자의 날’인 지난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혈의집 광화문센터에서 한 시민이 헌혈하고 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연합]
‘세계 헌혈자의 날’인 지난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혈의집 광화문센터에서 한 시민이 헌혈하고 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연합]

[헤럴드경제=특별취재팀]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가 추진하는 면역검사시스템(혈액선별기·시약) 도입 사업이 때아닌 법적 다툼으로 번졌다. 최근 적십자는 혈액선별기 입찰에 참여한 국내업체 피씨엘이 “적십자와 외국계 업체가 사전 담합한 정황이 있다”며 입찰 비위를 주장하자 이 회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발했다. 그러자 피씨엘도 맞고발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500억원대의 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사업이 쌍방 고발로 얼룩진 것이다.

이번 사례는 적십자를 둘러싼 잡음의 일부에 그친다. 적십자는 국내 혈액시장의 약 94%를 담당하는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하지만 각종 사업 과정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끊이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혈액 사업에 대한 정부 주도의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다시 힘을 받고 있다.

정부는 1981년 적십자에 혈액사업을 위탁했다. 이후 적십자는 42년째 관련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002년과 2012년, 각각 한마음혈액원과 중앙대병원 혈액원이 민간사업자로서 혈액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시장의 작은 틈새만 차지했을 뿐이다.

혈액의 안정적인 채혈과 수혈 관리는 국가의 전략적 영역이다. 적십자가 시장지배력을 갖추고 사업을 벌이는 것은 안정성 측면에선 긍정적이다. 하지만 계약업무, 부대사업 등과 관련해 크고 작은 잡음이 늘 뒤따른다는 점은 부정적인 대목이다. 혈액사업의 신뢰성이란 또 다른 가치가 훼손될 수 있어서다.

▶계약 특혜부터 담합 의혹까지=감사원의 적십자에 대한 기관 감사를 통해 적발된 문제들을 보면 ‘사업 특혜’ 사례가 여러 차례 언급된다. 23일 헤럴드경제가 국회 김원이(더불어민주당)·서정숙(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7~2021년) 내부 징계를 받은 적십자 직원은 119명이었다. 전체 직원 4295명의 약 3% 수준이다.

대부분 구매업무 등 외부와의 계약 관계에서 비롯된 비위가 지적됐다. 감사원은 지난해 적십자병원이 의약품과 수술재료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특정 상표를 지정해 입찰공고를 낸 사실을 확인하고 ‘주의’를 통보했다. 서울적십자병원 등 7개 병원은 최근 4년간(2018~2021년) 연평균 86억원 규모의 의약품을 구매했는데 이 중 약 20%(16억원)가 입찰을 거치지 않은 수의계약이었다.

적십자 측은 이에 대해 “효능이 떨어지는 저가 복제 의약품이 선정되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특정약품을 지정했을 뿐 특혜를 준 건 아니다”고 해명했다.

분획용 혈장 판매 논란도 오랜 지적 사항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적십자는 제약 회사 2곳에 수년 간 국민이 무상으로 제공한 혈액을 원가보다 30%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렇게 혈장을 넘겨 발생한 손실은 최근 5년간 527억원 규모다. 적십자는 이를 두고 “수입혈장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가격이 낮게 책정됐다”고 해명했다.

일부 사업에서는 담합 의혹도 불거졌다. 2020년 국정감사에서는 적십자가 30회 이상 헌혈자들에게 주는 ‘헌혈 유공장’을 남품 과정에서 특정 업체 2곳이 담합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유공장 제작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적십자는 지난해 유공장을 유공패로 바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관리·감독 사각지대”=감사원은 지난해 “적십자의 계약업무가 일상 감사의 사각지대에 있다”고 지적했다. 적십자 운영지침을 보면 추정가격 1억원을 초과하는 계약 체결은 일상감사 대상이나, 감사 의뢰주체는 본사와 혈액관리본부로 축소돼 있다. 교육원, 지사 등 43개 기관, 47개 사업장의 담당하는 계약업무는 감시에서 벗어난다. 2017년부터 2021년 4월까지 일상감사 대상이 되는 계약 1039건 중 601건(57.8%)의 계약이 일상감사를 받지 않았다.

적십자사 안팎에서는 국가의 혈액관리 체계에서 정부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된다. 이런 취지에서 2019년 국회에선 국가 주도 혈액사업 총괄 기구인 국가혈액관리정책원을 설립을 골자로 한 법안이 발의됐으나 ‘옥상옥’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법안 소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부는 2020년 ‘1차 혈액관리 기본계획’을 세우는 등 혈액 관리에 국가 정책 역량을 확대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책과 더불어 일상적인 혈액 업무의 투명성을 담보하는 정부의 역할과, 기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강주성 전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일부 사업에서 논란이 계속되는 건 적십자의 독점적 구조에 기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적십자의 혈액 사업을 분리해서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다른 전문가는 “전문인력이 부족한 복지부를 대신해 혈액관리위원회나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이 적십자를 컨트롤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며 “관리 체계를 재점검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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