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전범국이다. 전쟁범죄의 책임이 있는 나라다. 일본은 한국(조선)과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범죄를 저질렀다.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은 외세의 침탈과 인권유린으로부터 국민과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인류의 가장 중한 죄인 전쟁범죄는 일본에 물어야 될 일이고, 전쟁과 외세로부터 국민과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은 조선 왕조와 관료들에게 따지는 것이 맞는 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하고 영토를 유린한 러시아는 전범국이다. 러시아는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했으며 전 세계 경제에 크나큰 악영향을 미쳤다. 그 죗값은 러시아 정부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물어야 될 일이되, 그렇다고 폭력으로부터 국민의 일상과 생명을 보호하고 국가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국가에서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은 자신을 선출하고 자신이 대표하는 국민에게 ‘정치의 결과’에 대한 무한책임을 진다. 민주국가에서 정치는 ‘과정’에 의해 정당화되고 ‘결과’에 따라 심판받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전쟁을 막는 데 실패했다. 싸우지 않고 지킬 수 있는 외교와 국방을 하지 못하고 국민과 영토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내몰았다. 국민이 국가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선에서 군복 입고 싸우는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전쟁을 막는 외교와 국방의 현명한 지휘자다.

때아닌 ‘식민사관’ 논란을 낳았던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지난 11일 페이스북 발언은 거창하게 역사관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전쟁범죄’와 ‘망국 책임’의 측면에서도 한 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정 위원장은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라고 물으며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백성과 나라를 외세 수탈의 먹잇감으로 내준 망국의 책임은 엄연히 조선 왕정에 있되,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탈하고 참혹한 전쟁을 벌인 죄까지 부정될 수는 없다.

과거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사정을 에둘러 다시 오늘의 한반도 현실로 돌아오면, 지금 우리 국민도 발밑에 전쟁의 뇌관을 딛고 사는 형국이다. 북한이 연일 무력도발을 감행하고, 우리 정부도 한미 동맹, 한미일 안보공조를 내세워 강경 대응하고 있다. 여권에선 전술 핵 재배치나 나토식 핵 공유, ‘실질적 핵 공유’ 등의 다양한 핵무장론도 나오고 있다.

이 엄중한 환경에서 우리 국민이, 그리고 훗날의 역사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은 두 가지다. 북한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우리 정부 및 국가지도자들이 이 땅에서의 전쟁을 막지 못하는 일이다.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나면 한쪽은 반드시 전쟁범죄의 죗값을 물어야 하고, 다른 쪽은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정치지도자는 국가와 국민의 운명에 ‘무한책임’을 진다. 그들에게 막강한 권한과 명예를 부여한 이유다.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위야말로 그 ‘무한책임’의 최우선 대상일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전쟁을 막지 못해선 안 된다. ‘승전’보다 평화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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